당신의 영혼은 병들어가고 있다
얼마전 코끝이 찡하도록 감동적인 사진 한 컷이 인터넷 매체에 올라왔다.
함박눈이 펄펄 내리는 한 가운데 엉거주춤한 나이든 모습의 남자와 그에게 외투를 방금 입혀 준 듯 걸쳐진 외투아래로 지갑에서 돈을 꺼내 건네는 듯한 젊은 남자의 모습이 그림처럼 한 컷으로 나온 사진 한 장이었다.
그 사진 설명에 따르면, 한겨레 기자가 다른 일로 취재하러 서울역에 갔다가 멀리 보이는 그 광경을 목격하고 심상치 않아 보여 무조건 셧터를 누르고 달려가 보니 그 젊은 사람은 빠른 걸음으로 이미 사라져 버렸고 나이든 모습의 노인은 노숙인이라고 한다. 사연인 즉, 추운데 차 한잔 마시게 해달라고 했는데 그 젊은이는 외투를 벗어주고 오만원권까지 건네었다는 것이다.
이런 사연과 함께 실린 그 사진 한 컷에 가슴 따듯한 감동을 느끼지 않을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왜 그럴까? 왜 아무 관련도 없는 우리가 감동을 받았을까? 아름다워서 아님 인간애가 느껴져서 아니면 나는 못했는데 누군가 했다는 것이 고마워서 일까. 모두 맞는 말이다. 당신의 감성이 움직였다면 어떤 이유라도 다 옳은 이야기다. 그런데 왜 당신의 찡한 감성이 이때 일어났을까?
우리는 살아가면서 많은 관계들 속에서 살아간다. 가정에서는 가족이 직장에서는 상∙하 관계와 동료가 그리고 사회에서는 친구와 이웃 사이가 함께 일정한 관계속에서 살아가도록 되어있다. 이 관계는 일정한 의미가 있기때문에 유지되는 것이다. 가족은 혈연관계가, 직장은 내 생계를 책임져야하는 일터로서, 사회에서는 친분이라는 의미로 서로가 서로에게 의미가 부여된 채 살아가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의미가 변질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필자 생각으로는 아마도 자본주의가 시작되면서 돈의 위력이 모든 다른 가치들을 제치고 강하게 자리잡기 시작하면서 부터가 아닐까 한다.
언젠가부터 혈연이라는, 일터라는, 그리고 친분관계라는 순수한 의미가 다른 관계로 변질되기 시작했다. 상대방이 혈연이라는 끈끈한 애정관계가 아니라 단지 내게 ‘돈 벌어 주는 도구’로서의 인간으로, 생계를 위한 일터에서는 동료이거나 윗사람이 단지 나의 승진 기회를 만들어 줄 수 있는 힘과 자리를 가졌는가 아닌가의 여부로 평가하는 ‘이득의 도구’로서 인식하기 시작하고 이웃과 친분관계도 내게 얼마나 ‘이득을 줄 도구’ 인가로 평가하면서 우리의 관계는 스멀스멀 무너지기 시작했다.
몇 일전 일본에서 일어난 끔찍한 사건은 이 말을 극명하게 뒷받침하고 있다. 딸이 엄마를 살해했는데 이유인 즉, 그 엄마는 딸이 의사가 되기를 무척 바랬다는 것이다. 그래서 딸은 엄마의 소망에 부응하려고 아홉 번이나 의사시험에 응시했으나 번번히 떨어져서 결국 간호사가 되었고 간호사가 된 딸에게 그 엄마는 여전히 의사시험 볼 것을 계속 종용하다가 그만 딸이 못 견디고 엄마를 살해했다는 내용이다. 엄마는 딸을 소중한 혈연 관계 로서의 딸이 아니라 내 욕망을 채워줄 ‘도구’로 본 것이다.
인간 관계를 일종의 내 욕구를 채워줄 ‘도구’로 여기는 일은 우리사회 도처에서 여전히 일어나는 현재 진행형이다. 자식이 부모를 돈 주는 ‘도구’로 여겨 돈 안 준다고 폭행과 살인행위를 하는가 하면 노후 잘 모실 거라는 갖은 달콤한 언사로 부모의 재산을 빼앗고 늙은 노부모를 나 몰라라 하는 일이 다반사로 일어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어디 그 뿐 이랴. 정치인은 표 한 장을 구걸하기 위해 갖은 거짓으로 포장하고 당선된 뒤에는 그 권력을 이용해서 온갖 이익을 다 챙기고 있었음을 우리는 너무나 많이 알고 있다. 이런 어지러운 잘못된 ‘도구인식’의 홍수속에서 점점 세상이 피폐해 가고 있다.
소중한 인격을 지닌 상대방을 도구로 인식하기 시작하면 당신의 영혼은 그만 당신 곁을 떠나고 만다. 당신의 마음과 머리속은 온통 어떻게 하면 내가 상대방으로 부터 최대 최고의 이익을 뽑아낼 수 있는가로 꽉 차 있을 것이며 이러한 생각은 당신 몸을 구성하고 있는 사뜨바(sattva) 라자스(rajas) 타마스(tamas)라는 세 개의 구나 가운데 라지스를 아주 활성시키기 때문이다. 몸을 구성하고 있는 세개의 구나는 일정한 비율이 있어서 어느 한쪽이 강해지면 다른 쪽은 힘이 약해지도록 되어있다. 에너지 요소인 라자스(rajas)가 지나치게 활성화되면 곧 당신의 육신도 균형을 잃어버려 생체리듬이 깨지고 결국에는 고혈압 등의 질병으로 이어지게 된다.
생체리듬의 균형이 무너진다는 것은 곧 몸의 원활한 신진대사에 문제가 일어나게 되며 그로 인한 여러가지 성인병이 발생하게 되는 것이다. 대신에 당신의 영혼을 지켜줄 맑고 순수한 빛의 에너지인 사뜨바(sattva)는 그만 있어야할 자리를 점점 빼앗겨서 힘 못쓰는 상태가 되니 당신의 정신과 의식은 온통 활성화 성향의 라자스가 자리해서 신경질을 자주 내며 다혈질이 심화되어 명료한 의식이 결핍되니 정확한 판단능력도 상실하게 된다. 나아가 당신의 순순한 영혼이 차츰 자리를 비우게 되니 상대에 대한 공감능력이 떨어지고 의식상태도 명징하지 못하니 매사에 다른 사람에게 감동을 줄 수가 없게 된다. 이렇게 되면 당신의 영혼은 서서히 좀먹어 들어가는 증상에 걸리게 된다. 이런 사람의 얼굴을 보면 피폐하기 이를데 없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것을 당사자인 자신들은 절대로 느끼지를 못한다는데 있다. 아마 이것을 느낄 수만 있다면 누구라도 상대를 도구로 보는 행위는 멈춰질 것이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사람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고, 앞선 글인 <편향적인 사고가 부르는 위험 (Ⅰ)>에서처럼 사람에게 항상 일정한 ‘상표’를 붙여서 보고 더 나아가 ‘도구’로 까지 가야 하는 것일까. 그리고는 그 일에 너무 익숙해져서 이제는 그런 행위를 그만 둘 수 없는 지점에까지 다다른 것일까. 우리는 한번쯤 이 지점에 물음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
석가모니 붓다에 따르면,사람을 사람인 그대로 볼 수 있다면 그건 바로 깨달음을 얻은 부처라고 한다. 말하자면 ‘상표’나 ‘도구’ 라는 편향적인 시각없이 상대를 그대로 바라볼 수만 있다면 그가 바로 깨달음을 얻은 사람이라는 것이다. 말하자면 그런 깨달음에 도달하지 못했기 때문에 우리 모두는 그렇게 진한 ‘상표 붙이기 놀음’이나 ‘도구’로보는 잔인한 심정을 가지게 된다. 그리고 인간이 가진 탐욕스럽고 분노하고 어리석은 마음이 이러한 모든 행위들을 일으키게 하는 원동력이 되는 것이다.
그러고보니 앞에서 본 그 한 장의 감동적인 그림 같은 컷이 우리 모두의 감성을 강하게 울렸던 것은 아마도 상대방을 ‘상표’나 ‘도구’가 아닌 인간 그대로의 가치로 대하는 모습이었기 때문에 그토록 가슴 찡한 감동을 받지 않았을까. 아주 오랜만에 별천지 사람을 보는 것 같은 감동이 주는 훈훈함은 앞으로도 더 자주 릴레이처럼 보는 세상이 왔으면 좋겠다는 생각은 필자 만이 아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