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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iddhi kim Jun 24. 2024

인간의 몸은 악기와 같다

--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악기는 인간의 몸이다-

인간의 몸이 악기(instrument)와 같다는 말을 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입꼬리가 올라가는 미소를 보이며  즐거운 상상을 하는 것 같 다.


 모두들 생각하는 그런 의미로 받아들이는 것은 무리가 아니다. 왜냐하면 다른 세계를 경험해 보지 못했기 때문이 아닌가. 그렇지만 준희가 말하고자 하는 악기의 의미는 많이 다다.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악기는 인간의 몸이다


준희는 근무 대학에서 보직을 맡게 되었다. 각 분야 주요 보직자들은 일주일에 한 번은 본관 회의실에 모여 회의를 한다. 그때 자주 옆자리에 앉았던  과학영역의 교수가 차 마시는 시간에 이야기를 한다.


내용인 즉, 동생이 의사인데 동양의 신비한 철학과 내용에 관심이 많아서 만나고파 하는데 시간 좀 내줄 수 있는 가 하는 거였다. 늘 옆자리에 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고받던 처지라 거부하는 건 실례가 되는 거 같아 그러마라고 했다.

 

이틀 후 평일 퇴근 후 저녁 6시경 한적한 음식점에서 만나기로 했다. 준희가 도착해서 보니 자동차가 두 대 세워져 있었다. 지방에 있는 음식점으로 평일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나 손님은 없다. 만나기로 한 광주에서 오는 의사 동생 차와 늘 옆자리에 앉았던 교수의 자동차인가 보다 했는데, 갑자기 준희 목 한쪽에 강한 통증이 느껴 왔다.

 

분명, 의사동생은 목 언저리에 문제가 있던 것도 아니고 또한 옆자리 교수님도 아무 문제가 없었는데 정말 이상하다고 생각하며 안내된 방으로 들어간 순간,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그 방에는 의례 함께 올 줄 알았던 교수는 없고 의사동생과 함께 낯선 사람이 있었다. 누구냐고 물으니 형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삼 형제였으며 교수의 동생 둘이 온 것이었다.  

 

그 낯선 동생을 보자마자 준희는 궁금해서 앉기도 전에 물었다.

 

혹시 목에 무슨 병이라도 있나요?”

아니 어떻게??”


그는 몇 년 전 목에 경동맥을 수술했다는 것이다.

준희 자신도 그분들도 모두 놀라 소스라쳤다.

"어떻게 자동차만 보고도...."

준희는 이런 놀라운 쇼크?를 자주 겪는다.



 

이런 놀라운 몸의 감각을 준희가 느낀 것의 시초는 히말라야에서 만났던 50대 남성의 질문으로부터 다. 그때 준희 강연을 듣고 찾아온 그 두 사람은 준희가 마치 엄청난 능력을 소유하고 있는 양 대하는 태도였다. 그러면서 본인에게 아들과 딸이 곧 대학에 가야 하는데 어떤 전공으로 해야 하는가였다.

 

물음을 받는 순간, 약간 기분이 안 좋았다. 여태껏 그런 식의 질문을 들어본 적이 없는데... 순간 마치 점쟁이? 가 된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물음에 답변을 해야 할 것 같은 의무감? 같은 걸 느꼈다. 늘 누군가의 걱정을 들으면 어떤 식으로든지 해결해 주고 싶은 마음이 굴뚝처럼 솟아나는 준희의 성향으로서는 모른척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아이들 이름을 물었다. 이름을 듣자마자 온몸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정보? 가 느껴졌다.


 

이것은, 마치 연주가가 악기를 불거나 치거나 간에 그 나오는 음악은 연주가가 원하는 대로 소리를 내는 것과 같았다. 연주자가 이 소리를 치기 원하거나 저 소리를 불기 원하면 뭐든 원하는 대로 소리를 낼 수 있지 않은가. 그 소리가 누구도 따라올 수 없이 탁월하고 창조적이면 세계적인 연주가로 정평이 나게 되지 않은가.  

 

준희는 인간의 몸도 이런 악기 같다는 생각을 한다. 그리고 세상의 어느 악기도 인간의 몸보다 더 위대할 수 있을까 매번 감탄한다.


일반적으로 5감(感)이나 6감(六感)이 통상적인 감각작용이라고 한다. 보는 눈, 듣는 귀, 냄새 맡는 코, 말하고 먹는 입, 아픈 통증을 느끼는 몸 그리고 생각하는 의식이 그것이지만 준희가 경험한 바로는 온몸 곳곳에서 신호가 읽힌다. 온몸이란 머리 뇌부터 인체 내부 각 장기들 그리고 피부와 팔과 다리 등 어느 하나 예외가 없다. 이 모든 조직들이 한 가지 대상을 놓고 준희가 집중하면 그에 대한 정보가 읽힌다.  

 

준희가 집중하면 뭐든 원하는 정보를 얻을 수 있으니 이런 멋진 악기가 세상에 어디 있으랴. 이 글을 읽는 혹자는 그럼 주식투자해서 주식을 맞추면 얼마나 좋을까 라는 생각을 할 수 도 있다. 안 그래도, 누군가가 본인이 간접 주식 투자를 하고픈데 중간 매개인이 사기성이 있는지를 알고 싶다고 했다.


인간의 귀한 능력을 그렇게 사적인 탐욕의 영역에는 쓸 수 없다. 왜냐하면, 탐욕이나 사적인 이익이 개입되면 더 이상의 인지능력 계발은 되지 않는다. 그 이유는 사적인 욕망이 들어가면 '절대집중'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대상과 의식사이에 갭이 생겨서 일체감이 불가능하게 된다. 일체감이 되어야 대상과 하나가 되는데 그 하나가 되지 못한다. 그래서 결국 그 대상 인식을 올바로 그대로 읽어내는데 실패하게 된다.


이것은 마치 라디오나 티브이를 볼 때 정확한 주파수가 맞춰져야 원하는 프로그램을 듣거나 볼 수 있는 거와 같다. 주파수가 맞지 않으면 잡음이 나서 제대로 알아들을 수 없거나 화면이 고르지 못해 볼 수 없는 것처럼, 대상에 집중해서 감각기관을 통해 인지능력이 발휘되려면 일체의 잡음이나 사념이 있어서는 안 된다.




준희가 주차장에 세워져 있는 차를 보고도 그 차 주인의 건강상태가 감지되고, 그 아이들의 이름을 들었을 때 온몸에서 그들에 대한 정보가 감지되었다고 했다.


준희가 약속장소에서 주차된 차를 볼 때 그냥 눈으로 쳐다본 것이 아니다. 자녀 이름을 들었을 때도 그냥 귀로 이름 석자를 들은 것이 아니다.


"그럼, 어떻게 보고, 어떻게  들었을까?"


주차장에 도착했을 때,  준희의 마음은 곧 만날 두 사람에게 오롯이 집중되어 있었다. 구체적으로 더 설명한다면, 일체의 잡념이 없었다는 것이다. 예를 들자면, 누군가를 만나기 전에 우리는 흔히, 내 모습이 어떨까? 거울 한번 더 봐야 되지 않을까? 혹은 무슨 말을 할까.... 등등 사람들은 누구를 만난다면 의례 이런 식의 생각들이 머릿속을 맴돌면서 만나는 것이 다반사다.  


그런데 준희에게는 이런 일체의 잡념? 그러니까 상대를 만나는 일에 자신을 먼저 챙겨보는 일이 없다는 것이다. 오롯이 상대를 향한 일념(一念) 상대에 대한 마음과 생각 만으로 보고 듣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 대상을 향해 마치 불교에서 화두를 들듯이 그대로 선정(禪定)에 든다고 할 수 있다. 선정이란 지금 이 순간, 과거도 미래도 아닌 현재의 순간 찰나에 그대로 하나가 된다는 의미다.  


그 대상을 준희는 보거나 들으면서 그대로 하나가 되는 것이다. 그 자녀들의 이름을 들었을 때도 그 이름 주인에 곧바로 몰입되며 하나가 되어 그의 몸을 그대로 감각하기 때문에 온갖 정보가 고스란히 인지되는 것이다. 말하자면 대상과 혼연일체가 된다.  


그런데 왜 보통은 잘 안 되는 것일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몸조차 제대로 이해를 못 하며 살고 있다. 본인 스스로에 대해 얼마나 알 수 있는가를 말하라면 대부분은 몇 마디 이어 나가지를 못한다. 모르기 때문이다.

'왜?"

자신에게 조차 온전히 몰입이 안되기 때문이다.




불교에서는 삼독(三毒)인 탐진치를 버려야 한다고 한다. 그래야 부처가 될 수 있으니 명상이나 참선을 해야 한다고 한다. 망상이나 잡념,  탐욕과 화내는 일 그리고 성내는 어리석음의 세 가지 독을 없애야 한다고 한다.


준희는 이 말이야말로 바보 같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이 삼독을 없애야 함은 당연한 진리이다. 그러나 그 방법이 달라야 한다는 것이다. 없앤다고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마치 어린아이에게 맛난 간식을 앞에 놓고  "먹지 마"를 아무리 말하고 윽박질러도 먹고픈 아이의 욕망은 말리지 못하는 것과 같다. 그러나 그 아이에게 그 간식을 먹지 말라고 하는 대신에 놀이 장난감을 주어 '시선 집중'을 돌리면 그 장난감을 가지고 노는 재미에 간식은 곧 잊어버릴 것이다. 마찬가지로 잡념을 없앤다고 참선이나 염불로 며칠을 머무르며 아니 평생을 매달려도 쉽게 없어지지 않는다. 그러니 오죽하면 독(毒)이라고 했을까.


준희는 불교 공부를 하면서 이런 문제가  해결될 수 없음을 알았다.

그렇다면, "어떡해?"

없애려고 노력하는 부정적인 방법대신에 긍정적으로 다른 것에 몰입하는 방법이다.

 

이때, 가장 중요한 것이 신뢰 곧 완벽한 믿음(信)이다.

이 ' 믿음'은 종교적인 믿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확고한 확신(self-confidence)을 뜻한다.


생각해 보면, 사람들은 자신에 대한 확신이 부족하다.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자신에 대한 자긍심 부족이다.

    

그러나 몸의 감각을 키워 인간의 인지능력을 계발하면 저절로 해결된다는 것도 체험을 통해 알게 되었다.                     


이 방법은 일부러 몸의 감각을 키우는 작업으로 시작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손톱 밑에 가시 하나만 들어도 고통을 느낀다.

육신의 건강은 인간의 인지작용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몸이 아프면 만사가 귀찮지 않은가.

그러니 몸 건강이 확실한 기반이 되어야 한다.


살아있는 모든 생명체에게 몸 보다 우선 하는 것은 없다.

불교에서는 일체유심조(一體唯心造)를 강조한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몸이 불편할 때 과연 마음이 하나로 모아질 수 있을까.

역으로, 몸이 아주 건강하게 되면 자신이 목표 한 바를 향해 일취월장할 수 있는 힘이 보태져서 훨씬 빠르게 나아갈 수 있지 않은가.


건강하게 된 몸은 원하는 바 무엇을 하든지 성취하게 되어 있다.

물론, 일신상의 영달과 안일만을 위한 탐욕에서 건전하지 못한 방향으로 간다면 더 이상 볼 것은 없다.

그 결말이 뻔하기 때문이다. 당장 달콤한 맛은 반듯이 쓴맛이 뒤에 기다리고 있음은 수많은 인생지표들에서 확인된 바 있지 않은가.


문제는, 몸의 건강함은 마음보다 우선한다는 것이 준희의 지론이다.

이런 건강한 몸은 인간이 가진 엄청난 능력을 계발할 수 있는 기초가 되며 그 과정은 뇌신경세포와의 상호 작용을 통해 인간이 지닐 수 있는 최대의 인지능력 계발로 확장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일상적으로 6감(六感)을 통한 인식과, 무엇을 대상으로 하거나 간에 그 대상과 하나가 되는 혼연일체의 선정(그 시간은 몇 초 면 충분하다)에서 감각하고 인식하는 것과, 그 판단의 차이는 과연 어떻게 다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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