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Siddhi kim Jul 01. 2024

몸은 어떻게 산과 물을 보는가?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

준희가 지금도 인상에 남아있는 사람 가운데 한 분이 있다. 학부시절에 불교 중론(中論)을 강의하던, 오래전에 고인이 되신 교수님이다. 그는 강의 도중 학생 질문에 대한 답을 하시면서 덧붙여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내가 열심히 여러분들에게 공(空) 사상을 강의하고 있지만 실제로 그 공(空)을 직접 체득하지 못했기 때문에 괴로울 때가 많다.”

 

당시 어떤 질문인가는 기억에 없지만, 그 말씀을 하시던 고뇌에 찬 교수님의 표정과 더불어 학생들 앞에서의 진솔한 고백? 은 준희 마음에 남아있다. 세상 존재하는 모든 것은 실체가 없다는 불교의 공 사상을 학기마다 멋지게 강의하지만 스스로 그 공(空)을 직접 체득하지 못했다는 '송구함'이었다.  


그분의 고뇌는 몇십 년이 지난 뒤 확실하게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그분은 정말로 존경받아 마땅한 학자였음을 이제야 알 수 있다. 그 이유는 역으로, 최고의 학자 운운하는 전문가 집단들이 책을 통한 지식만으로, 거기에 덧붙여 말로 잘 풀어내는 재주까지 겸해 온통 자신이 그 분야 최고 최상인 양 자처하는 사람들이 널려 있는 것을 보고 나서다.  


그 교수님처럼 적어도 본인이 설명하는 것을 직접 몸으로 체득하지 못함을 고뇌하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 그들은 책이나 여러 자료들을 통해 얻은 지식을 마치 자기가 직접 보고 듣고 스스로 체득한 것 인양 열심히 전파하는 것을 보노라면 적어도 그런 식의 본질적인 고뇌는 없어 보인다.


"직접 보고, 직접 듣고, 한다는 건 무슨 의미일까?"

"스스로 체득한다는 것은 어떤 인가?"



불교에 유명한 선문답가운데 가장 잘 알려진 한 문장!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


이 말은 언뜻 보기에 뻔한 것 같이 보인다.

그럼,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지 뭐야.

맞는 말이다.

그런데 문제는 산을 산으로 물을 물로 보지 않는다는데 모든 문제가 있다.


산을 산 자체로 볼 수 있고, 물을 물 자체로 볼 수 있음은 바로, 대상이 온전히 자신의 눈으로 만 바라볼 때 가능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산을 산으로 직접 보는 대신에 누군가의 해설을 듣고야 안다.


저 산은 이렇고 저렇고 등등. 저 물은 이래서 좋고 이런 역사를 가지고 있고 등등.

말하자면, 사람들이 뭔가에 대해 안다고 하는 것은 대부분 남들에 의해 전해진 것, 그것이 기록이 되었거나 소문이 되었거나 간에 남을 통 알고 이해한다는 것이다. 간접적으로 얻은 앎(인식)인 것이다.


즉, 있는 그대로 직접 보고, 듣고,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다는 것은 곧 깨달은 자(佛陀)라는 것을 의미한다.

달음을 얻었을 때만이 직접 볼 수 있고, 직접 들을 수 있다는 말이다. 보고 듣는 것이 타인의 해설에 의한 간접적인 방식이 아니라, 온전히 자신의 통찰력을 통해 직접 꿰뚫는 것이다.


영어로 표현하면, "See things as they are!"  다.

대상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다는 것은 그의 인식 능력이 최고의 수준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깨달음이란 최상의 직관력을 의미하고 그것은 최고의 인식능력(High Level of Perception)에서 만이 발휘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사람을 만났을 때, 사람 그 자체로 보지 않는 경향이 있다. 외모, 돈이나 지위 혹은 소유한 물품 등으로 언 듯 판단한다. 말하자면, 사람 그 자체로 바라보지 않기 때문에 상대의 존엄한 인격은 안중에도 없기 일쑤다.


물건도 마찬가지다. 한때 아주 떠들썩했던 일명 '오가피 사건'도 대상을 바로 알지 못하고 소문이나 광고에 현혹되어 일어난 사건이었다. 오래전 이야기 같은데, 티브이 홈쇼핑에서 오가피 광고가 여기저기서 엄청나게 나오며 채널마다 불티나게 팔렸다. 완판이라 외치 생중계로 팔리던 상품은 오가피룰 짜서 넣은 즙 팩이었다.  


준희는 그 팔고 있던 오가피를 스크린 하니 몸에 안 좋은 성분이 섞여 있다는 것을 알았다. 오가피는 정말 몸에 좋은 성분이 많은 재료임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그런데 준희가 보니, 거기에 뭔가 안 좋은 것이 있었다. 그제품들이 불티나게 팔리는 것을 보고 걱정을 하며 지켜보았다.


보름 정도 지나서 인가 갑자기 오가피 소송 사건이  뉴스를 뒤덮기 시작했다. 그 제품들을 마시고 부작용으로 병이 나서 입원소동이 벌어졌고 드디어 고소고발 사건으로 줄을 이었다.


그렇다. 이런 것이 대상을 바로 알지 못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인 것이다.

말하자면 소문이나 광고에 현혹되어 판단하고 결정한 사람들에 의해 일어난 한바탕의 소동이었다.

그렇다면, 우리가 살아가는 일상에서는 어떨까?  과연 '오가피 사건' 같은 판단이 안 일어난다고 할 수 있을까?




우리가 '뭔가를 안다'라고 하면 그것은 경험을 통해 아는 것으로, 인지(認知)라고 한다.

그런데 그 '아는 것'에 구별이나 식별이 들어가서 판단해서 아는 것을 인식(認識)한다고 한다.

인식에는 우리의 5감을 통한 감각, 지각과 여러 가지 이론 가설 추론 개념등이 모두 포함된다.


예를 들어 설명하면, 사람들이 멋진 풍경의 산을 본다고 하자.

그 감상은 정말 각양각색일 것이다. 

그 다양한 감상에는 각자의 과거 경험도 포함되며 상상력도 가미된다.

누군가와 함께 왔던 기억 또는 저렇게 멋진 자연에서 프러포즈나 결혼식을 하고 싶다는 상상력도 가질 것이다.

이런 모든 감각 지각 인지 판단 가설 개념 등등 이 모두 인식(認識)이라는 범주에 속한다.  


즉, 당신이 안다고 하는 것은 이런 다양한 감각적, 경험적 요소들을 하나의 신호로 묶어 낸 '인식'인 것이다. 그러므로 당연히, 나와 경험이 다른 당신의 인식이 다를 수밖에 없다.

   

그런데 그 산을 어제 갔고 오늘 갔고 내년에도 간다면 그때마다 다른 연상된 감각과 경험이 일어나게 될 것이다. 우리는 늘 살아가면서 새로운 일상을 경험하기 때문에 그에 따른 새로운 감각이 생기기 마련이다.

이런 것들은 우리 각자의 내면에서 데이터로 축적된다.

그리고 이 데이터는 전과는 다른 새로운 인식결과를 낼 것이다.



결과적으로, 우리 일상의 인식(認識)은 우리가 살아온 경험 데이터에서 나온 총체적인 메커니즘을 한데 엮은 데서 나오는 것이다. 마치 합창단의 화음이 어우러져 멋진 음악을 만들어내는 것과 같다.



우리가 산과 물을 보고 인식하는 데는 우리 몸의 눈과 시신경뿐만 아니라, 지나 온 경험 속에서 나온 여러 가지 감각과 판단이 한데 어우러져 나온 메커니즘의 결과인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인식작용을 높이 올리는 고급화?(High Level of Perception)는 어떻게 가능하게 될 것인가?

인식작용의 고급화는 무슨 의미인가?

그 고급화된 인식이란 결국 깨달음이란 말인가?


이런 의문들이 연이어 일어나지 않을 수 없다.         

        

                


           

  

 

이전 19화 인간의 몸은 악기와 같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