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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눈에 진달래꽃

by silvergenuine

그 때 그 첫 눈이 오던 날 먹었던 첫 잔 만큼의 엄청난 효과는 아니지만

기침 날 때 진달래액 효소를 먹으면 좀 나아지는 것 같다.

어릴 때부터 감기에 걸렸다하면 지독스레 기침을 했다.

동네 병원약을 먹어도 낫지를 않자

기침을 잘 낫게 한다는 어느 약방에 가서 맥을 짚게 하셨다.

"애가 기관지가 안 좋네요, 그래서 기침이 심하고 잘 안 나아요"

그 후 부모님은 이런 저런 민간요법을 듣고 실행에 옮기셨다.


4학년 어느날 아빠가 양파망 같은 것에 땅벌이 앵앵대고 있는 땅벌집을 캐오셨다.

"이거 먹으면 감기가 싹 낫는다더라."

"으악,이걸 어떻게 먹어?"

부모님은 가마솥에 그걸 그대로 삶으셨고,

한약색의 땅벌꿀물이 만들어졌다.

그릇에 떠주신 걸 꿀떡꿀떡 마셨는데 달달하니 먹을 만 했다.

가마솥 뚜껑을 열면 땅벌이 둥둥 떠있었는데

난 비위가 참 강했나보다.

달달해서 그랬는지, 기침이 싫어 그랬는지 11살 여자아이는 그걸 직접 떠마셨다.

그러나 며칠을 먹어봐도 감기기침은 별로 나아지지 않았다.


엄마는 감기약이 떨어지면 다시 병원에 데려가 주사도 맞히고, 매끼마다 네다섯알의 감기약을 꾸준히 먹게 하셨다. 그래봐도 일말의 차도가 없었고, 이 때 내성이 확실히 생겼는지 지금도 기침약, 가래약 같은 걸 먹으면 나아지기는 커녕 감기가 오히려 연장되는 느낌이다.


한 번은 꿩이 기침에 좋다고 꿩고기를 사오셔서 국을 끓여주셨는데, 맛은 좋았지만 역시나 차도는 없었다.


6학년이 되던 해 3월, 부모님께서 어느 산에서 진달래를 한 보따리 따오셨다.

어디서 들으셨다면서 단지에 진달래와 설탕을 층층이 넣고 땅에 묻어뒀다가

첫 눈이 올 때 캐내어 먹으면 기관지에 좋을 거라고 하셨다.

"이번에도 꽝이며 어떡하지?"

난 별 기대가 없었다.


그 해 봄 한철을 기침을 달고 살다가 귀에 물이 차는 증세가 생겨 한달을 이비인후과에 다녔다. 고막이 녹으면 청력을 잃을 수도 있다는 원장님 말씀에 대성통곡을 했던 기억이 난다. 다행히 귀치료는 잘 되었고, 유월이 다 되어서야 겨우 감기를 떼어냈다.

그리고 다시 초겨울이 되자 어김없이 감기 기침이 시작되었다.

밤마다 기침을 하느라 이불을 덮어쓰고 겨우 잠을 자곤 했는데,

어느 밤 엄마가 소주잔에 연갈색의 액체를 담아오셨다.

"이거 마시고 자라."

"이게 뭔데?"

"진달래 엑기스, 오늘 첫 눈 왔다 아니가? 그래서 봄에 묻어놨던 진달래 단지 캐내서 걸렀다. 요것만 먹고 자봐."

"술냄새 나"

"술냄새 나나? 그래도 약이라 생각하고 마셔래이."

설탕에 재운거라 엄청 달고 걸쭉했다. 한 잔을 쭉 마시고 잠을 청했다.


다음날 아침에 일어나는데

기침이 십 분의 일 수준으로 줄어들어 있었다.

드라마틱한 효과였다.

그 뒤로 한 두번을 더 마셨고,

기침 감기가 뚝 떨어졌다.

'기침을 안하고 사는 게 이렇게 좋은 거구나'


나의 빈약했던 기관지는 정말 신기하게도 그때 이후로 남들만큼은 좋아진 것 같다.

감기에 걸리긴 하지만 다른 사람들처럼 1~2주 앓고 나면 회복되곤 한다.


진달래의 어떤 성분이 어떤 효능을 주었는지는 잘 모르지만,

이제는 내가 직접 진달래 효소를 담그곤 한다.

설탕 적게 넣어보려다 망칠 때도 있었지만

진달래 영약에 대한 애정은 여전하다.

그 때 그 첫 눈이 오던 날 먹었던 첫 잔 만큼의 엄청난 효과는 아니지만

기침 날 때 진달래액 효소를 먹으면 좀 나아지는 것 같다.

원래 몸이 바닥을 쳤을 때 약발이 빛을 발한다.


또 한 번의 진달래 한 철이 다녀간다.

차일피일 미루다보면 진달래는 어느새 가버리고 없을테지, 게다가 올해는...


올해 산불이 어쩜 이렇게 전국 곳곳에서 번져나갔는지.

며칠 전 바람이 우리 동네에도 산불의 그을린 냄새를 실어왔다.

6일 만에 내린 비로 우리 지역은 완전진화가 되었고,

창 밖으로 보이는 앞산에 어느새 참나무 새순이 연두빛을 드러내는 걸 보았다.

산불이 지나간 자리에는 봄기운에 한껏 신이 났었을 나무들이 검게 타버린 채 서있겠지.

그리고 산불에 타버렸을 진달래꽃들. 생명들...


또 얼마나 지나야 다시 그만큼 산이 자라날까.

다시 나무를 심고,

바람과 새들이 씨앗을 옮기고,

비가 오고 눈이 오고 세월이 흘러

이 산불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거의 사라졌을 때쯤 산은 다시 우거져있기를.

엄마아빠가 땅에 묻어둔 진달래를 첫 눈에 다시 찾아냈듯이

그 산의 진달래도 다시 돌아왔기를.



산불로 인해 목숨을 잃으신 고인의 명복을 빌며 그분들의 가족과 사랑하는 이들에게 깊은 위로를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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