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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기저귀 루틴

뭐든 해보기 전에는 막막한 법

by silvergenuine

지영이는 아니지만 82년에 태어난 나는 그 시절 제법 용기있게 태어난 셋째다. 내 용기가 아니라 부모님의 용기.

당시 <아들딸 구별말고 둘만 낳아 잘 기르자>는 출산 정책에 따라 셋째 이상을 임신한 엄마들을 데려다 단체로 낙태수술을 시켜주기도 했었더랬다.

(이름도 애매한 ‘월경조정술 사업’ /

관련기사: 합계출산율 0.98의 비밀

https://www.hankookilbo.com/News/Read/201903141091067720)

#조사하면 다 나와 #진짜 죽을 뻔 했네


당시 엄마도 동네 어귀에 낙태 시킬 임산부들을 태우러 온 봉고차를 타러 나가셨는데, 거기서 마음을 돌려 나를 낳기로 했다고 한다. 당시 셋째는 의료보험혜택도 주지 않는 등 강력한 산아제한정책을 시행하던 때였기에, 이미 뱃 속에 든 나를 낳기로 마음 먹는 것에 용기와 주관이 필요하셨을 것이다. 그렇게 나를 낳고 난 후에는 국가 지원으로 배꼽 수술이라 불리는 영구피임술을 받으셨다.

그렇게 세 남매를 낳고 길러내신 엄마는 자식이 셋인 것에 대해 후회가 없으셨고, 시대만 안 그랬다면 넷도 좋았을 거라고 하신다.

“낳아보니 셋째는 거저 크더라. 분유 태워주면 지가 이불 펴놓고 기다렸다가 분유병 받아 흔들면서 들고 가서는 떼구르 누워서 먹다가 자고 있고. 그 시절에 일회용 기저귀 쓰는 엄마들도 생겼는데, 엄마는 다 천기저귀로 너희 키웠다. 빨아서 마당에 널어놓으면 하얀 기저귀들이 참 보기가 좋았어.”

엄마의 그 말씀이 내게 와서 꽂혔다. 천기저귀라!

“천기저귀 나도 해볼까, 엄마?”

“하면 되지, 요새는 세탁기가 다 빨아주니깐 더 수월하지, 옛날에 비하면 일도 없다.”

엄마 말씀이 씨가 되어 천기저귀를 해보겠단 생각이 무럭무럭 자라버렸다.

첫째 출산을 앞두고 천기저귀를 장만했다. 엄마의 옛날 경험대로 광목천에 노란 고무줄을 샀다. 천기저귀를 할 거라고 하니 지인이 쓰던 거라며 기저귀 커버도 몇 장 물려주셨다. 땅콩 기저귀를 많이 들어봤는데 어떤 건지 감이 안 와서 그냥 엄마가 하셨다는 대로 광목천을 2겹으로 박아 반 뼘 정도 폭으로 개어놓았다.


출산 후 병원과 조리원에서 일회용 기저귀를 쓰다가 집에 오니 천기저귀를 어떻게 써야할지를 몰랐다. 내가 원래 치밀하지 못한 편이라 ‘그냥 하면 하겠지’라고 생각했던 건데 얼마만큼의 두께로 채우고, 어떻게 빨아야 할지 감이 안 왔다.

게다가 신생아 초기 모유수유에 온 정신이 가있어서 천기저귀에 대한 로망은 저 뒤로 밀어두고, 일단 마트에서 산 일회용 기저귀부터 사용하기로 했다.

아기가 집에 오고 일주일쯤 지났을 무렵, 아기 엉덩이가 빨갛게 헐기 시작했다. 기저귀 발진이라고 했다.

(나의 모유수유를 말렸던) 첫 산후도우미에게 조심스럽게 천기저귀에 대해 말을 꺼내보았다.

“천기저귀 쓰면 발진이 나아진다던데, 제가 장만해둔 천기저귀가 있는데 한 번 해보면 안 될까요?”

“참나, 요즘에 누가 천기저귀를 써요? 일회용도 얼마나 좋은데, 천기저귀 쓴다고 발진 안 나아져요. 대신에 우리집에 알로에 있는데 내가 내일 그거 가져와서 발라줄게요, 알로에 바르면 금방 나아.”

차마 그 도우미에게 더 말도 못해보고, 그녀가 퇴근한 후 혼자 천기저귀를 한 번 채워줘보았다. 내가 너무 얇게 채웠는지 아기의 쉬 한 방에 속싸개까지 다 젖고 말았다. 다시 시도해볼 엄두도 못내고 그 산후도우미가 무서워 천기저귀를 사용한 흔적을 얼른 치워버렸다.


다음 날 산후도우미가 알로에를 가져와서 아기 엉덩이에 문질문질 바르면서 말했다.

“이제 금방 나을 거에요, 다른 애들도 발진 오면 알로에 바르면 금방 낫더라. 천기저귀는 무슨...”

“네, 어서 나으면 좋겠네요. 알로에 감사해요.”

그러나 아기 엉덩이는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산후도우미는 남은 알로에를 자꾸 발라주라고 했다.


계약한 2주가 지나 그 산후도우미가 떠난 후, 새로 오신 산후도우미님께서 아기 발진을 보시더니

“천기저귀 하면 금방 나을텐데, 혹시 천기저귀 없어요?”

라고 먼저 말씀하셔서 깜짝 놀랐다.

“천기저귀 있어요. 그런데 저번에 제가 한 번 시도해봤다가 너무 젖어서 더 사용을 못했어요.”

“두께를 잘못 대서 그럴 거에요.”

“그런 것 같긴 했어요. 그래도 천기저귀 쓰면 세탁이 너무 힘들텐데 어떡해요?”

“다 할 수 있어요. 내가 알려줄게요. 걱정하지 말고 한 번 해봐요.”

그리고는 천기저귀의 적절한 두께와 천기저귀 커버를 이용하는 방법을 알려주시며 우리집에 천기저귀를 개시시켜주셨다. 천기저귀를 사용하자 아기의 엉덩이 발진이 하루만에 거짓말처럼 싹 나았다. 오, 천기저귀! 


그 분께서는 본인 아이들도 천기저귀로 키웠으며 아이들이 자란 후, 그 천기저귀는 수건 대용으로 쓰고 있다고 하셨다. 일반 수건보다 흡수력이 좋다고 하시며. 아이들에 대한 추억도 함께 간직하고 계신 거겠지.

도우미님께서는 천기저귀를 갈고, 애벌빨래를 하고, 솥에 삶은 후 세탁기에 돌려 건조대에 널고 개는 과정을 매일 반복하시며 구체적인 노하우를 알려주셨다. 너무 감사했고, 우리 부부도 할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모유수유에 천기저귀까지 가능하게 해주신 우리의 두 번째 도우미님께서 떠나신 후, 본격적으로 부부의 천기저귀 루틴이 만들어졌다.

최대한 힘을 덜 들이고, 한 방에 할 수 있는 방향으로!

1. 기저귀를 갈고 나면 샤워기로 헹구고 욕조에 턱턱 걸쳐 놓는다. 똥기저귀는 변기에 대고 샤워기로 씻겨내린 후 역시 욕조에 걸쳐 둔다.

2. 저녁에 샤워하기 전 기저귀에 대충 비누칠을 쓱쓱 한다. (안 쓰는 세수비누 사용)

3. 샤워하면서 기저귀를 발로 밟아가며 애벌빨래를 완료한다.

4. 솥에 기저귀를 담고 과탄산소다와 베이킹소다를 넣어 삶는다.

5. 삶긴 그대로 세탁기로 직행, 더러울 것도 없으므로 아기 옷과 나중에는 어른 옷까지 그냥 한방에 세탁기를 돌린다.

6. 건조대에 넌다.

7. 다음 날 햇살에 다 마른 기저귀를 걷어 다시 사용하기 좋게 개어놓는다.

루틴이 잡히자 어려움이 없었다.

하루 12~15개 정도 사용했고 매일 세탁하면 갯수가 부족하지 않았다. 다만, 햇살이 없는 날씨에는 마르는 시간 때문에 문제가 생기기도 했는데, 그럴 땐 일회용도 사용했다. 일회용은 밤에 길게 잘 때나 외출 시에 사용했는데 한 달 평균 60개 들이 한 봉 정도 사용했다. 일회용만 사용할 경우 한 달이면 하루10장*30일=300장 정도 쓰일 텐데, 천기저귀 덕분에 아기도 좋고, 기저귀값도 굳히고, 우리 가족 몫만큼의 환경오염도 덜어냈다.

아이가 자라니 외출이 잦아져서 일회용 사용도 늘었지만, 집에서는 거의 천기저귀를 사용했다.

첫 아이가 기저귀를 뗄 때까지 천기저귀를 계속 사용한 후, 둘째를 위해 잘 챙겨두었다.


나름대로 베테랑이 된 우리 부부는 둘째가 집에 온 후, 바로 천기저귀를 사용했다.

아이가 기저귀를 뗀 후, 주변에 어디 물려줄 데가 없나 알아보았지만 지인 중에는 선뜻 해보려는 이가 없었다. 우리 산후도우미님처럼 수건으로 써야겠다고 생각하며 붙박이장에 모셔두고 있었는데, 셋째가 오면서 우리가 다시 사용하게 되었다.


이제 건조기까지 있으니 매번 널지 않아도 되어 더 편리할 테지.

이런 말을 하면 남편은 그래도 햇볕에 말리고 싶다고 한다. 그건 건조기 돌려보고, 햇살이 너무 아까운 날 한 번씩 널어도 되지 않을까.

이제 또 2년의 천기저귀 여정이구나. 육아에서 기저귀만 떼도 완전 편해지지.

어차피 차야하는 기저귀라면 천기저귀를 사용하는게 우리 부부에게는 당연해졌다.

여기에는 기꺼이 기저귀를 삶아주는 남편의 공이 지대했다.

고마워요. 꽃봄이 엉덩이도 잘 부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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