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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치료 당함

후회되서 자꾸 생각이 난다.

by silvergenuine

시간을 돌릴 수는 없지만, 결정은 번복할 수도 있다.

번복할 수 있는 결정도 있지만, 번복할 수 없는 결정이 있다.


<다시 할 수 있는 결정>

물건 교환 및 환불, 구독 취소,숙소 변경, 연애, 결혼, 입시, 취업과 이직, 병원 변경, 이사...

더 많겠지만, 그 때 그 때는 고심했어도 시간이 지나니 이렇게 기억하지 못할 정도로 삶에서 소소하게 지나간 결정들일 것이다. 시간과 비용이 들더라도 다시 결정할 수 있고, 선택의 결과는 그럴만 했거나 홀가분했을 것이다.


<되돌릴 수 없는 결정>

내뱉은 말들, 빌려주고 못 받는 돈, 사기 계약, 범죄, 일어나버린 사고, 어제 안 판(안 산) 주식, 지나간 시간 속에 했던 후회되는 행동들, 그리고 생명과 몸에 대한 결정들...


최근 15, 16번 어금니 쪽이 한 번씩 시리고 지근거렸다. 수돗물만 머금어도 점점 더 심하게 시려와서 일상생활 회복을 위해 치과에 갔다.

알아두면 편리한 치아번호

초등학교 때 아말감으로 떼운 것들을 9년 전에 세라믹 인레이로 모두 교체했었는데, 그 치과 의사의 솜씨가 엉망이었는지 그 때 이후로 하나둘 치료할 일들이 생기곤 했다.

이번 15번과 16번 치아 중 어느 것에 어떤 문제가 있는지 뚜렷하지 않아 엑스레이를 찍어보았는데 둘다 충치치료했던 위치가 깊어 눈으로는 확정짓기 어렵다 했다. 그래서 원장님이 찬 솜을 15, 16번에 번갈아대보며 어디가 더 시린지 말해보라 했는데, 둘다 느낌이 비슷했다. 뇌에서 통증을 받아들일 때 15, 16 자리가 모두 시렸고, 15번이 더 심한 듯이 느껴졌다. 애매한 가운데 결국 15번을 먼저 신경치료해보자고 원장님이 권했다.

15번을 해서 괜찮아지면 16번은 그냥 두는 것이고, 계속 시리면 16번까지 신경치료를 해야되는 것이다.

(신경치료를 한번도 안 해본 분들은 신경치료가 무엇인지 모를 수 있다. 나도 스무살 즈음 첫 신경치료를 해보기 전에는 전혀 몰랐다.

신경치료는 신경을 치료해서 살리는 게 아니라 신경을 제거해서 더이상 치통을 느끼지 못하게 하는 조치를 말한다. 즉, 이를 죽이는 것이다. 신경을 통한 혈액공급이 끊기므로 치아는 점점 약해져 쉽게 금이 가거나 깨질 수 있다. 그래서 후속 조치로 치아 겉면을 깎아내고 세라믹이나 금으로 크라운을 씌우게 된다.

그래서 처음 신경치료라는 표현을 들었을 때 기만이라고 생각했다. 무슨무슨 치료라고 하면 그것을 나아지게 해야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치아 관련 정보를 알아보면서 비록 신경은 제거하더라도 치아를 발치하지 않고 뿌리라도 보존하는 것이 그나마 임플란트나 틀니보다는 삶의 질이 훨씬 낫기 때문에 치료라고 이름붙인 것으로 이해하게 되었다.)


나와 치과 원장님은 맞는 결정을 한 것일까?

이제 결과는 통증의 지속 여부로 알게 된다. 내가 운이 좋기를 바라며 15번 치아 신경을 과감히(?) 제거했다.


그 날 저녁, 마취가 풀리면서 불행히도 다시 이가 시리기 시작했고, 밤새 그 전날보다 더 심하게 지근거리는 통증이 찾아왔다.

치과에서 찜찜하고 개운하지 못한 결정을 할 때 정리하지 못했던 정보와 지식들이 밀려들었다. 6번 어금니는 5번보다 훨씬 크기 때문에 치아 뿌리와 그 안에 자리한 신경망도 훨씬 크다. 그래서 6번 치아가 극심하게 아파지면 주변에 있는 치아들까지 아픈 것처럼 뇌의 수용체가 속게 된다.

치아 신경 분포

밤새 16번 주변으로 더 심해진 치통을 느끼며 신경 치료할 치아를 잘못 선택한 것 같다는 생각에

"아, 망했다." 라는 말이 절로 나왔다.


다음날 바로 그 치과를 다시 찾았고 결국 16번 어금니의 신경까지 제거했다. 드디어 시림 증상이 사라졌고 먼저 치료했어야 하는 치아는 16번이었음이 확실해졌다.


7년 전, 반대쪽 26번 어금니를 신경치료했던 날의 기억이 이제서야 소환되었다. 당시 며칠동안 지근거리게 아프던 치통으로 오후 예약을 잡아두었는데, 그 날 오전부터 극심한 치통이 시작되었다. 그 때 느꼈던 통증은 출산의 고통보다 더 심했다. 치아에서 뇌로 통증이 직통으로 전해지기에 참아볼 겨를도 없이 눈물이 줄줄 흘렀다. 출산은 내가 힘을 주고 아기가 나오면 진통이 끝날 거라는 희망이 있는데, 치통은 의학의 도움없이 멈출 수가 없었다. 26번이 아프면서 양 옆, 아래 쪽 치아까지 다 아픈 것으로 느껴졌다. 눈물을 흘리며 급히 찾아간 치과에서 어느 이가 아프냐고 물었지만 어느 하나를 특정할 수도 없었다. 그래서 원래 치료하기로 했던 26번 자리부터 마취를 해주었고, 마취약이 듣자마자 치통이 순식간에 가라앉았었다. 그렇게 26번을 신경치료했었는데, 이번에 6번 어금니의 영향력을 까맣게 잊고 15번부터 치료했던 것이 잘못된 선택이었다.



한번 죽은 치아 신경은 되살리지 못한다.

난 결정 실패로 생니 하나를 더 잃게 되었고, 치료 시간과 비용도 2배로 들게 되었다.

신경치료를 마무리하고 크라운을 씌우고 10~30년 조심히 사용하다가 뿌리마저 상하게 되면 임플란트를 하게 되겠지. 치아 하나의 가치를 5천만 원으로 매긴다는데, 미래의 발치 가능성을 추정하면 5천만 원의 추가 손실이 생긴 것이다. 슬프다. 술 푸고 싶은데, 모유수유로 술도 못 푸니 글로나마 풀어본다. ......?


결정할 때 찜찜하다면 더 신중해야만 하는건데, 나를 에워싼 압박감 속에 해버린 결정은 이렇듯 무거운 댓가를 치르게 만들기도 한다.


세상 다 잃은 표정으로 침울해하는 나를 보며 남편은

"당신 이는 자꾸 왜 그럴까? 그만 좀 속 썩이지. 고마 15, 16 둘 다 신경치료 대상이었다고 생각하자."

고 제안한다. 사실은 아닌 것 같지만 그렇게 믿어버릴까, 아니면 계속 복기하면서 내 결정에 지극히 속상해할까?

생각은 꼬리를 물고, 이미 했던 생각이 다시 찾아와 속을 끓이기를 반복.

이제 그만 생각을 말자.

일어난 일은 일어난 일.

아니다, 다시 생각하고 조사해서 더 많이 아는 사람이 되어 과잉진료 당하지 말고 내 몸을 지켜야겠다.

돌아보면 난 이렇게 말을 해야했다.

"어느 이가 문제인지 원인을 정확히 모르는 상태에서 신경치료를 하는 건 아닌 것 같아요. 며칠 더 있어볼게요. 만약 더 아파지면 그 때 큰 어금니인 16번부터 마취해봐서 통증이 사라지면 그 이가 문제인 것이니 그 때 신경치료를 하도록 해요."


선택을 할 때의 상황과 분위기, 내가 가졌던 정보들을 복기하면서 왜 정확한 결정을 하지 못했는지 후회하고 자책했다. 정말 결정적인 순간이었는데, 이미 지나가버렸다.

앞으로 다시 이런 상황이 닥친다면 그 때는 더 좋은 결정을 할 수 있을텐데,

인생은 왜 1회차인가. 2회차처럼 살아보고 싶다.


[지금 알고 있는 걸 그 때도 알았더라면]

오죽하면 이 말이 책 제목이고 베스트셀러일까.

돌이킬 수 없는 결정에 애달파하고

할 수만 있다면 시간을 돌리고 싶은 일들이 사람마다 삶마다 얼마나 많을까.

그럼에도 삶은 모두 현재진행형.


후회와 자책도, 원망도 망각을 통해 무의식 속에 가라앉겠지.

더이상 할 수 있는 결정은 없다. 그냥 덤덤히 치료를 계속하고 마무리지을 수 밖에.

<덧붙임: 아무래도 과잉진료 당한 것 같은 억울함이 자꾸 올라온다. 인간이 하는 생각의 대부분이 어찌할 수 없는 것에 대한 것이라는데, 이제 와서 어찌할 수 없음을 알면서도 다시 또 속이 상한다 2025.7.1. 5차 신경치료를 앞두고>


[내가 틀릴 수도 있습니다]의 저자 비욘 나티코 린데블라드는 루게릭으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자신의 병든 몸을 원망하기보다 애처롭고 다정하게 바라보았다.

"그러니까 육신은 말하자면 우리가 착용하는 우주복과 같은 것입니다."

지구에 태어나 내가 받은 우주복의 내구성이 떨어지고 고장이 나는데, 그럭저럭 최선을 다해 버텨준 것에 고마움을 표현했다.

그 분에 비할 바는 못 되지만 그 생각이 현재의 나에게 위로가 되어 떠올랐다.

건치는 아니지만, 이렇게라도 씹고 뜯고 맛볼 수 있으니 고마워하며 살아가자고.

고마워하는 마음으로 약해져가는 내 몸을 잘 지켜주며 살아가야지.


+치과는 신경을 최대한 보존하고 교합을 우선으로 봐주는 곳을 찾아야 합니다.(2025.7.9. 크라운 제작을 앞두고 회한)

+지르코니아 크라운의 불편감에 대한 의견들을 보고 결국 15번은 레진으로 떼워두고, 16번만 지르코니아 크라운을 했다. 음식을 씹을 때 식감이 예전같지 않음을 느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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