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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군지에 살아요

그럴 거면 왜 거기 살아요?

by silvergenuine

우리 가족은 지역에서 소위 학군지로 불리는 곳에 입성하여 10년 째 살고 있다.


학군을 국어사전에서 찾아보면

(배울 學, 무리 群)

입시 제도의 개편에 따라 지역별로 나누어 설정한 몇 개의 중학교 또는 고등학교의 무리.

인터넷에 통용되는 사회적 정의를 찾아보면

입시 성적, 학업 성취도, 교육 환경이 우수한 지역이며, 부모들의 교육열과 더불어 학원 문화가 발달한 지역이라고 한다.

사람들이 흔히 학군이라고 했을 때 전국적으로 유명한 학원이 얼마나 들어와 있는지 보는 걸 보면

요즘 쓰이는 학군이라는 말은 국어 사전보다는 사회적 정의에 더 가까운 것 같다.


우리 첫째 아이가 두 살 되던 해, 남편이 시골 학교에 부임하게 되면서 도심에 있던 집은 비워둔 채 운동장 곁에 딸린 사택에 1년 반 정도 들어가 산 적이 있다.

운동장에서 걸음마를 익히고, 80명 쯤 되는 전교생의 사랑을 받으며 잘 지냈지만

여러 사정 상 언젠가는 사택을 비워야할 터였다.

살던 아파트는 좁고 불편해서 새로운 보금자리를 찾기로 했다.

전원주택에 로망이 있는 나는 인터넷 부동산 사이트를 보고

시골집이나 개인 화단이 딸린 아파트 1층, 또는 베란다가 넓고 햇살이 잘 드는 매물 위주로 후보를 추려 남편과 집을 보러 다녔다. 막상 가보면 맘에 쏙 들지 않고 걸리는 것들이 많아 선뜻 결정을 할 수가 없었다.

이러저러한 매물을 보러 가자고 하는 건 주로 나,

보고 나서 더 있어보자며 만류하는 건 주로 남편.

부부가 만장일치가 아니면 부동산은 함부로 밀어붙일 수가 없었다.


여러 후보지 중에 현재 살고 있는 학군지는 원래 우리의 목록에 없었다.

우리 지역에서 여기 학군지는 당시에도 유명했는데,

살아본 적이 없는 나에게 이 곳의 이미지는

교육열이 너무 드세서 사교육에 돈을 쏟아붓고

아이가 시험에서 한 문제라도 틀리면 부모님께 혼이 난다는 이상한 동네였다.

게다가 평단가가 다른 곳보다 비쌌기에 가계 사정상 마음에서 접어두고 있었다.


그러다 딱 한 번 여기 학군지의 한 매물을 눈여겨 보게 되었는데

그게 지금 살고 있는 이 집이다.

아파트 앞에 공원이 있고, 뒤에는 초등학교가 있으며

1층이지만 생울타리가 자라고 있어서 도로에서 쉽게 들여다보이지 않고

베란다 문을 열고 앞화단에 드나들 수 있어서 흙을 접할 수 있다.

앞에 건물이 없어서 햇살이 잘 들고, 1층이라서 주변 매물보다 저렴했다.

서른 초반이었던 우리는 시부모님께도 매물을 보여드리며 조언을 구했는데

두 분께서도 공원과 학교를 이유로 찬성하셔서

마음에 걸림이 없이 바로 가계약금을 입금하고 이 집과 인연을 맺었다.

그러고보니 마침 딱 그 때쯤 태중에 있던 둘째의 성별이 왕자라는 것도 알게 되어

형제 양육을 위해 1층으로 마음을 굳혔었다.


그 결과 이 곳에 10년 째 눌러앉아 살고 있다.

부자가 되려면 이사를 많이 다녀야 한다는데,

여기 사는 걸 가족 모두가 참 좋아해서 도무지 이사갈 의욕도 이유도 없다.

초코아(초등학교가 코 앞에 있는 아파트)여서 아이들 등하교가 안전해서 제일 좋고

조금만 걸어나가면 외식, 소아과, 치과 진료 등은 다 가능하고,

막상 집 앞에 있으니 오히려 자주 안 가긴 하지만 공원이 있어서 마음이 아늑하다.


사람들에게 여기 산다고 하면

우리가 아이들 학원을 엄청 많이 보낼거라고 짐작했다가

방과후와 태권도만 하고 있다고 하면

"그럴 거면 왜 거기 살아요?"라고 반응하기도 한다.

유명한 학원들이 밀집해 있어서 아이들이 알아서 학원을 오갈 수 있다는 이점 때문에

사람들이 이 동네 오려는 것 아니냐, 학원 안 보낼 거면 굳이 거기 살 필요가 있느냐는 이야기인데

살아보니 살기가 좋아서 계속 살고 있을 뿐이다.


학원은 안 보내지만, 우리 부부가 교육열이 없는 부모는 아니다.

초등학생이 고등수학, 수능 영어까지 선행해야한다고 생각한다면

우리가 교육열이 없어보이겠지만.

학교 가서 선생님 수업에 집중해서 배우고!

방과후에서 다른 것도 배워보고, 운동도 하고!

집에 오면 자기 문제집 정해진 분량만큼 풀고!

어디 가서 욕 안 먹게 가정교육 똑바로 하고!!

이것이 우리집 교육열이다.


<교육열에 불타는 우리가 소위 학군지에 살아서 좋은 점>

1. 학교에 가면 면학분위기가 있어서 공부가 당연하다.

공부한다고 면박받거나 좀생이라고 무시당하지 않는 분위기이며,

아이들의 목표설정이 높고 진로에 대해 긍정적인 영향을 주고 받는다.

학원 숙제 때문에 힘들다고 하소연하는 아이들이 많은 덕분에

우리 아들들이 학원 보내달라는 소리 안하고 집에서 스스로 자기 분량만큼 공부하고 있다.

(럭키비키잖아?)

우리처럼 교과 학원을 따로 보내지 않는 가정도 종종 보이는데, 가정에서 부모가 살펴봐서인지 학원에 안 다녀도 웬만하면 기본 이상은 하는 것 같다.


2. 가정환경이 안정적인 경우가 많아서 각자 자기 자녀들 관리가 잘 되는 편이다.

7세 고시처럼 학부모의 지나친 관심이 독이 되는 경우도 있겠지만, 내 주변을 보면 부모가 적정선을 지키며 자녀에게 필요한 사랑과 관심을 주려고 애쓰는게 보인다.

대체로 이 곳 아이들은 욕을 잘 안 한다. (개)새끼야는 큰 욕이고, 10원짜리 욕도 잘 안 쓰는 편이다. 욕을 쓰면 이례적으로 보여서 아이들끼리 먼저 자정 작용이 일어나고, 선생님이나 학부모들 귀에 들어가는 것도 시간 문제다. 물리적 폭력도 드물고, 담배, 불법중고거래, 성범죄, 절도 같은 문제도 들어본 적이 없다. 물론 아직 초등까지만 보내봐서 초등에 한정된 이야기이고, 나만 모르는 것일 수도 있지만, 모를 수 있다는 게 다행이다.


3. 학교교육과 선생님을 존중하는 분위기이고 대체로 예의를 지킨다. 준비물이나 과제를 잘 챙기고 학부모끼리 담임에 대한 이야기를 주고 받더라도 앞에서 진상짓은 안 하는 편이다. (내가 근무해보진 않았지만 나름 보고 들은 게 그러한 것 같다) 교사들도 학군 분위기가 있으니 수업에 더 신경쓴다는 느낌이다.


좋은 부모 밑에서 바르게 자란 아이들은 학군지가 아닌 어디에 있더라도 자기 중심을 잡고 빛을 발한다. 하지만 환경이 어수선하면 중심을 갖고 자신의 길을 가기가 어렵기도 할 것이다.

학군지에 있어보니 아이가 사춘기가 와서 또래관계를 추구하고 부모 그늘을 벗어나고 싶어해도 크게 어긋나지는 않을 수 있겠다고 마음이 놓아지는 것 같다. 부동산 재테크는 엄두내지 못하지만 그저 소소한 마음으로 좀더 눌러앉아 있고 싶은 마음이다.

아, 살아보니 그런 이상한 동네는 아니었다.

어디나 사람사는 곳, 마음 맞는 좋은 이웃을 만났기에 더 오래 머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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