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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생애의 자전거들

몇 대가 스쳐간거냐

by silvergenuine

8살, 우리집엔 딱 내 키에 맞는 어린이용 자전거가 있었다. 그 자전거로 자전거를 배웠고, 어느 날 잘 타고 돌아오다가 집 앞 도랑에 동네 아이들이 물놀이하는 걸 보고 자전거를 냅다 세워두고 나도 물놀이를 했다. 놀고 나오니 이미 자전거는 온데간데 없었다. 동네 어린이 양아치가 집어 타고 가버린 것이다. 어디 갖다 팽개쳤는지 되찾을 수 없었다. 엄마아빠는 자전거는 쉽게 도둑 맞는 걸로 인지하고 계셨고, 순진하게 자전거를 그런 곳에 그냥 세워둔 내가 뭘 몰라서 그런거라 어쩔 수 없다고 하셨다. 자전거가 아쉬웠다.

9살, 집에 있던 어른 자전거를 탈 수 있게 되었다. 자전거를 타고 인적드문 들판을 돌아다니며 바람을 느끼는게 좋았다. 그런데 바보 같이 방심하다 논에 자전거랑 같이 처박혔다. 손잡이에 턱이 찍혀 작은 흉터가 남았다.


20살, 오빠 자전거를 버스 터미널에 매어두고 시내에 다녀왔더니 자전거는 도둑 맞고 없었다. 또 어떤 놈이냐...

게다가 내 친구가 자전거를 빌려갔는데 걔도 도둑 맞았단다. 그 해에 그렇게 두 대를 도둑 맞았다.


21살, 미래의 남편이 될 남친이 자기 자전거 뒤에 날 태워 집에 데려다주곤 했다. 내 엉덩이가 아프다고 하니 빨갛고 길쭉하고 깜찍한 쿠션을 사서는 뒷좌석에 고정해주었다. 팔불출같이 빨간 쿠션을 달고 다니는 남친의 자전거가 부끄럽기 보다는 고마웠다.


23살, 남친이랑 중고로 사서 잘 타고 다니던 자전거가 지역을 비운 사이 일주일간 장마비를 맞아버려 고물이 되고 말았다. 기름칠도 별소용이 없었다.


26살, 남친이 삼천리 여성용 자전거를 선물해주었다. 처음 가져본 새 자전거였다. 가장 가볍고 가장 빨랐다.

그러나 28살 봄, 대구역 뒤 자전거 보관소에 묶어두고 고향에 다녀온 사이 도둑 맞아버렸다. 자전거 도난으로는 처음으로 경찰에 신고를 했다. 경찰차를 타고 칠성시장 중고 자전거 가게를 돌아다녔다. 어디에도 없었다.

몇 주 뒤 횡단보도에서 신호를 기다리다 내 것과 똑같은 자전거를 타고 있는 여인을 보고 의심을 한 기억이 난다. 어떤 표식도 해두지 않았기에 내 것이라는 증거도 없었다. 표식을 남기지 않은 걸 후회했다.


29살, 결혼 후 남편이 또 자전거를 사주었다. 자전거 바퀴에다 이름이랑 전화번호 같은 걸 써두었다. 아파트 현관 계단에 묶어두었는데 몇 달 지나지 않아 밤사이 도둑 맞았다. 도둑에게 표식이 무슨 의미인가..갖다 팔지 못하게 하는 것?

얼마 뒤 모르는 번호로 전화를 받았다. 정신나간 십대의 목소리가 냅다 십원짜리 욕설을 하길래 들어보다가 나도 맞짱으로 쌍욕을 했더니 바로 끊더라. 끊고나서야 불현듯 그 자전거 도둑이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뭐 어쩌겠어..


자전거 도둑이 판치니 새 자전거를 접고 사회적 기업에서 수선한 중고 자전거를 남편과 커플로 사서 타고 다녔다. 군복 같은 얼룩무늬가 칠해진 자전거였는데 그건 안 훔치네..왜? 구려?

그 자전거들을 우리도 타다 말고, 아이들이 태어난 후 새 자전거를 장만했다. 각자 유아용 안장을 하나씩 달고 자전거로 두시간 거리에 있는 시댁에 다녀오기도 했다. 그러다 아이들이 무거워지니 시나브로 그것도 그만 두었다.

아이들이 스스로 자전거를 타게 되면 온 가족이 자전거 나들이를 가려는 로망이 있었는데 아들들이 자전거를 배우려는 의지가 없었다. 그렇다고 억지로 가르칠 계획성이나 실천력도 없었다.

지난 겨울, 지인이 둘째에게 꼭 맞는 사이즈의 자전거를 물려주었으나 하루 연습해보고 그 다음 연습은 무기한 연기되었다.


그러다 둘째가 좋아하는 또래 친구가 최근 두발 자전거를 익혀 공원에 타러오곤 한다는 소식을 접했다. 아빠는 이 기회를 잡아 둘째를 부추겼고, 아들은 그들과 자전거를 타기 위해 흔쾌히 자전거를 배우겠다고 했다.

주말에 공원에 가니 때마침 그들이 있었다. 이미 잘 타는 친구들에게 주눅들지 않고 둘째는 설레는 마음으로 꿋꿋하게 내리막을 이용해 자전거 균형 잡는 법을 익혀나갔다. 친구들은 페달을 밟고 속도를 내는데, 혼자 페달을 밟지 못하니 어느새 뒤쳐졌다. 다정한 그 친구는 속도를 늦추고 주변을 맴돌며 격려해주었다.

오늘은 여기까지지만, 내일은 페달을 밟으며 탈 수 있을거야

그리고 다음날, 다시 찾은 공원에서 둘째는 혼자 두발 자전거의 페달을 밟으며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

본인이 정리하길

그 친구들 덕분에 자전거를 타고 싶은 의지가 생겼고,

아빠 덕분에 자전거 타는 방법을 익힐 수 있었다 한다.

또래친구를 보며 기꺼이 나도 할 수 있다고 마음 먹고 발 맞춰 나아간 성장의 모습이 아름다웠다.

내 생애의 자전거들에 이제 아들의 자전거가 한 페이지 보태어졌다.

자전거 하면 도둑부터 연상되던 나에게

이젠 한껏 설렌 아들의 모습이 더 빛나게 남을 것 같다.

아들은 아들만의 자전거 역사를 써나갈 것이고,

그 길이 유쾌하길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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