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했더니 편해졌다
"넌 유리컵 같아,
다 들여다보이고,
잘못하면 깨질까봐 걱정돼."
오, 쓰고 나니 손발이...
연애할 때 언젠가 남편이 해준 말이다.
속맘이 다 보이고,
잘못 건드리면 깨진 유리처럼 콕콕 찔러대는 여자친구였는데
초강력 콩깍지가 눈에 씌어서 좋아해주고 품어주니 고맙네요.
대학 시절, 여름 주말이나 방학 때 시골 본가에 가면
한번씩 새벽 6시도 안 되어 밭에 고추 따러 가야 하곤 했다.
졸린 눈을 비비며 겨우 부모님을 따라가서 고추를 따다보면
아침 8시 쯤부터 뜨거운 뙤약볕이 내리 꽂는다.
한번 가면 거의 점심 때가 되어서야 집에 돌아오는데
땀과 고추의 매운 기운에 녹초가 되버린다.
지금 생각하면 고추가 익어가기까지 모종 심고 농약치고, 지주대 매어주며 돌보신 부모님 노고가 훨씬 크지만
그 때는 고추 따는 게 고추 농사에서 제일 힘든 일인 줄만 알았다.
한번은 고추 따는 중에 아는 사람에게 전화가 와서 뭐하냐고 묻는데
선뜻 고추 따고 있다고 말을 하지 못했다.
그 때 그 질문을 받기 전에는 별로 자각하지 못했었는데,
농사 안 짓는 다른 집 친구들과 다르게 여름밭에서 고추 따고 있는 내가 창피했었나보다.
솔직하게 말하지 못한 그런 내 모습에 내가 놀라고 불편했다.
그런데 같은 상황에 지금의 남편이 된 당시 남자친구가 전화를 걸어왔을 때
"나 지금 밭에서 고추 따고 있어."
라고 그냥 대답이 나왔다.
그걸 거리낌 없이 말할 수 있다는게
내가 말하면서도 신기했다.
'이 남자 뭐지?' 라는 생각이 들며
날 있는 그대로 보여주고 받아들여질 수 있어서 좋았다.
얼마전 브런치 김인철 작가님의 [뒤끝이 있다]를 읽게 되어
대뜸 남편에게 물어보았다.
-나 뒤끝 있어?
-부인 뒤끝 없지. 단, 대화로 풀었을 때 없지. 못 풀면 계속 남아있지."
-맞네, 난 말로 풀어야 되는 사람이네. 못 풀면 뒤끝이 남고.
차마 내 마음을 표현하지 못하고 뒤끝을 안고 가는 관계도 있다.
그런 사람에게는 이제 와서 새삼스럽게 말할 수도 없고,
한 발 뒤로 물러서 그 사람을 대할 뿐이다. 그래도 그냥저냥 유지되는 관계라서.
남편과 아이들, 진정 소중한 사람에게는 그럴 수 없다. 속상한 게 있으면 대화로 풀어야 마음이 편하다.
남편이 얼마전 지인들과의 대화에서 내가 돌려말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했다고 한다.
별로 생각해보지 않았던 부분인데,
남편이 그렇다고 하니 그런가보다 싶고 계속 그래도 될 것 같았다.
그 후, episode 1.
남편이 퇴근해서 나에게 안겨있는 꽃봄이에게 바로 다가와
"꽃봄아아, 너무 보고 싶었어."
하이톤으로 말하며 뽀뽀를 하는데
나는 제대로 쳐다도 안 보고 뽀뽀도 안 해주고 손 씻으러 가버렸다.
꽃봄이 태어나기 전에는 그 뽀뽀 다 내 꺼였는데, 서운해해, 말아? 말해, 말아?
나더러 솔직하다고 말한 건 남편이니 이것도 표현하자 싶었다.
"나 삐졌어, 나한테는 뽀뽀도 안 해주고."
"아, 깜박했네."
하고 입을 내미는데, 어라? 엎드려 절 받는 거 같아 별로다. 부작용이 예상된다. 안 돼! 레드썬!
episode 2.
얼마전 충동적으로 직접 앞머리를 잘랐다.
근데 앞머리가 눈을 가리고 답답해서 결국 실삔으로 넘겨 꽂고 지낸다.
-나 앞머리 자른 거 후회돼. 눈 찔리고 귀찮아.
-왜, 앞머리 있는 거 예쁘던데.
(솔직히 안 예쁘고 엉망인데, 어쩌다 한번 자연스러웠을 때 본 걸 기억하는 것 같다.
그런데 잠깐! 앞머리 없는 건 안 예쁜가? 찜찜한데? 물어볼까?)
물어보면 답은 뻔하다. 그래서 그냥 정답을 날려줬다.
-앞머리 없어도 예쁘지?
-예쁘지.
그렇게 나올 줄 알았어. 그래, 말하니 개운하다.
누가 보면 남편이 잡혀산다고 하려나?
남편이랑 농담으로 '벽처가'소리도 한다.
*벽처가: 아내가 소리지르면 벽에 착 붙는 남편을 일컫는 말
농담은 했지만 벽처가 만드는 아내가 되긴 싫은데?
부부는 살아가며 서로 길들여지는 거라고 생각한다.
제 눈에 안경, 짚신도 짝이 있고,
콩깍지는 필수.
덕분에 남편 한정판 솔직함을 구사하고, 우리 사이에 맺힌 것 없이 다 풀어야 하는 나.
유리 같은 아내가 깨지지 않게 보호필름이 되어주는 남편, 고맙네요.
ps.가끔 내가 풀릴 때까지 풀 것도 없다는 당신한테 풀자고 해서 미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