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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연 Dec 27. 2022

잘 가요 할아버지.

외할아버지를 떠나보내며.

 날씨가 계속 험상궂었다. 처음으로 경기도의 겨울을 나게 된 부산 토박이한테는 더욱 그렇게 느껴졌다. 할아버지의 부고를 듣던 날도 그랬다. 남편과 결혼 2주년을 기념하며 스튜디오에서 사진을 촬영하고 있었는데 엄마로부터 부고를 전해 들었다. 당장 머리에 든 생각은, ‘올 게 왔구나. 여기서 창원까지 언제 가냐. 직장은 또 어쩌냐.’ 이런 현실적인 생각들이었다. 장례식장에 도착해서 할아버지의 영정 앞에 섰을 때도 별로 실감이 나질 않았다. 


 할아버지는 늘 곁에 가까이 계셨다. 같은 동네 같은 아파트인데 단지만 달랐다. 할아버지 집은 우리 집에서 걸어서 10분 정도 거리였다. 고등학교에 진학하게 되면서 학교를 오며 가며 할아버지 집을 자주 들렀다. 학교 가는 길 중간에 할아버지 집이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에 아빠의 학대를 피해 도망간 작은 낙원이기도 했는데 이런 내 속마음을 모르는 할아버지의 눈에는 내가 혼자 계시는 할아버지가 적적할까 봐 부지런히 찾아뵙는 기특한 막내손녀였겠지. 그래서일까. 명절이 되어 온 친척들이 모이면 할아버지는 나를 따로 불러 다른 사촌들보다 용돈을 더 얹어주시기도 할 만큼 특별히 나를 좋아하셨다.  할아버지는 항상 미드 CSI 시리즈를 보고 계셨는데 나는 재미도 없는 CSI를 할아버지와 함께 본 기억이 난다. 할아버지 집에는 항상 짜파게티와 식혜가 있었다. "할아버지. 짜파게티 끓여 먹어도 돼요?" 하고 물어보면 할아버지는 "그래그래. 니 다 무라." 하면서 웃으셨다. 내 기억 속에 할아버지와의 친밀한 기억은 이게 전부다.


 그 이후 언젠가 엄마의 유년시절을 들은 적이 있었다. 내게 늘 인자하고 너그럽고 쾌활하신 할아버지가 엄마에게는 그리 좋은 아버지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엄마뿐만 아니라 돌아가신 외할머니, 이모, 삼촌까지 할아버지 때문에 갖은 고생을 다 겪어야 했다는 사실도. 그때부터였을까. 나는 할아버지를 마음에서 멀리하기 시작했다. 우리 엄마를 힘들게 한 할아버지가 미웠기 때문이다. 그래서 할아버지를 일부러 찾아뵙지 않았다. 근데 사실 이를 악물고 멀리 한 건 아니었다. 굳이 만나려고 노력하지 않았을 뿐인데 억지로 노력하지 않으니 만날 일이 없어서 자연스럽게 오랜 세월 만나지 못했을 뿐이다. 그래서 할아버지의 부고가 더 와닿지 않았다. 돌아가시기 직전에는 뼈 밖에 안 남아서 앙상한 모습이셨다고 하는데 언제나 풍채가 좋으셨던 우리 할아버지라 앙상한 모습이 잘 상상이 되지 않았다. 친언니가 보여준 핸드폰 사진 속의 할아버지가 난생처음 보는 깡마른 낯선 노인의 모습인 것을 내 두 눈으로 보고서야 마음이 턱 내려앉았다.


 "이 좋은 세상, 천년만년 살 거다!"


 이 세상이 너무 좋으셨던 할아버지는 천년만년 살겠다는 꿈을 이루지 못하시고 여든넷의 나이로 먼 길을 떠나셨다. 할아버지의 목소리, 할아버지 냄새, 할아버지와의 추억은 모두 내 가슴에 묻어둘 것이다. 앞으로 나이를 먹어가면서 그것들은 점점 더 옅어질 테니까. 


 할아버지, 다치지 말고 아프지 말고 잘 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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