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후 우울증 서바이버

아이를 낳지 않았다면 몰랐을 그 무게에 관하여

by 솔직킴

둘째를 낳고 입소한 조리원은 한 건물 5층에 있었다. 봄 햇살이 좋은 날들이었고 창밖으로 보이는 파란 하늘이 기분 좋았다. 눈과 비가 많이 내리던 첫째 때의 겨울날과는 달랐다. 기분이 좋아 창문을 열려고 보니 미닫이 형태가 아닌 위쪽만 살짝 열리는 여닫이 형태의 창문이었다. 봄기운을 가득 받고 싶은데 창문이 열리지 않으니 답답했다. 나중에 조리원 사람들이랑 이야기를 하다 알게 된 사실인데 고층에 위치한 산후조리원의 창문은 활짝 열리지 않는다고 한다. 이유는 산모들이 겪는 산후 우울증으로 인해 발생할 수 있는 위험한 상황을 미연에 방지하고자 하는 것이라고 했다. 재밌게도 그 산후조리원 위층에는 시에서 운영하는 자살예방센터도 있었다. 완벽하게 산모들의 우울을 관리한다며 기가 막힌 건물 내 구성에 대해 같이 낄낄 대긴 했지만, 무서운 단어가 결부된 산후 우울증은 마냥 웃고 넘어가기 어려운 문제이다.


한동안, 그리고 지금까지도 사회적인 문제로 논의 될 정도로 우울증의 증상과 위험성은 많이 알려져 있다. 산후 우울증 또한 유사한 증상과 위험성을 보인다. 다만 그 발현 시기가 출산 후로 특정되어 있다는 것이 다르다. 산후 우울증이 발현되는 시기는 보통 출산 후 4~6주 사이라고 한다. 이 시기는 출산을 마치고 병원에서 보내는 약 1주일, 그리고 그나마 같은 상황에 있는 사람들과 약간의 소셜을 하면서 보낼 수 있는 조리원에서의 2주를 보낸 이후와 맞물린다. 집으로 돌아와 도우미 선생님과 함께 육아를 하는 이들은 그 시기를 보낸 뒤 스스로 육아와 정면으로 마주하는 즈음이 정확하게 산후 우울증의 발현 시기와 맞닿아 있다고 볼 수 있다. 홀로 오롯이 육아의 전쟁터에 우뚝 서며 어떤 엄마들은 우울과 불안으로 의욕과 집중력이 저하되고 육아에 대한 막막함과 아이에 대한 죄책감 등을 경험한다. 심한 경우는 자살이나 죽음에 대한 생각으로 일상생활에 지장을 초래한다.


말로 많이 들었기에 경계하고 있었지만, 첫째를 낳고 나서 겪었던 산후 우울증은 꽤나 심각했다. 시작시점도 빨랐다. 코로나19가 시작한 바로 그해 2월 첫째 아이가 세상에 나왔다. 병원에서는 그래도 가족들의 면회가 가능해 부모님과 동생 얼굴도 보면서 분주함 속에 마음의 우울함 같은 건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조리원에 들어가면서부터 남편을 제외한 누구의 면회도 불가능한 상황이 되었다. 조리원 내에서는 코로나19에 대한 불안으로 산모들 간의 교류도 쉽지 않았다. 그렇게 출산 후 1주일 정도부터 극심한 우울감과 불안이 몰려왔던 것 같다. 마음대로 되지 않는 수유 상황으로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한채로 각종 정보를 찾아가며 이리 휩쓸리고 저리 휩쓸리던 때였다. 생각해보면 나의 행동과 선택으로 좌우되는 육아의 면면이 엄청난 부담으로 다가왔던 것 같다. 어떤 선택이 옳은지를 모르는데 끊임없이 선택해야 했고(하다못해 쪽쪽이 브랜드 하나까지도) 그 선택으로 인한(생각해보면 다른 변수로 인한 것일 수 있는) 결과에 일희일비 하며 괴로워했다. 아이의 숨소리, 표정, 몸의 작은 상처 하나까지도 나의 영향인 것 같아서 그 막대한 부담감 앞에 한없이 우울했던 것 같다.


그런 내 상황은 모르는 채 그저 사랑스럽고 예쁜 아이로 인해 내가 행복만 가득한 본투비 엄마라고 생각해서 였을까, 양가에서는 첫 손주에 대한 반응이 뜨거웠다. 똘망똘망 눈을 가진 작고 꼬물거리는 생명체를 보려고 아침이고 저녁이고 모자동실의 시간이 되면 줄을 이어 영상통화가 걸려왔다. 우울에 시달리던 나는 사랑스러운 아이를 향한 환호조차 괴로웠나 보다. 다른 핑계는 대지도 못하고(차마 우울이라고 말하지 못하고) 팔이 아프고 힘들다며 전화 좀 그만하라고 그나마 가장 편한 엄마에게 엉엉 울며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안 그래도 일상이 자식에 대한 걱정과 관심으로 꽉 찬 우리 엄마는 내 반응이 심상치 않다고 느꼈는지 조리원으로 전화를 걸어 선생님들께 이 산모를 눈 여겨 봐 달라고 부탁해 나의 우울에 더욱 불을 지폈다. 설상가상 엄마에게 이런 내 반응에 조금 더 과장을 더해 전해들은 남동생은 출산 문외한 답게 '우리 누나가 정말 출산으로 손목이 아파서 그렇구나' 하고 바로 다음날 새벽배송으로 침대에 설치할 수 있는 휴대폰 거치대를 보내왔다. 그 새벽, 조리원에 도착한 택배 봉투를 뜯고서 그 무거운 거치대를 침대에 확 집어 던졌던 기억이 어렴풋이 나 얼굴이 붉어진다(그랬던 그 출산 문외한이 우울의 극단에 있었던 나를 보며 와이프가 출산할 때에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를 예습했다는 것이 그나마 위로가 된다).


가장 가까이서 이 우울을 감당 했어야 할 남편은 당시 회사의 한 프로젝트 TF팀으로 일주일간 합숙에 들어가며 자리를 비웠다. 그래도 같이 있으면 조금이라도 웃고 숨을 쉬었는데 그 합숙을 기점으로 나의 우울은 브레이크 없이 고조되었다. 잠들기 전에 울고, 잠에서 깨 유축을 하며 울고, 아이와 젖 먹이기 씨름을 하며 울고 또 울었다. 밥도 잘 먹히지 않아 살이 꽤 빠졌다. 그나마 생각을 좀 돌리려 책을 읽고 있으면 조리원 선생님들이 눈 나빠진다며 한 소리씩 하셨다. 남편이 합숙에서 돌아오고 집으로 돌아오며 조금은 나아졌지만, 당시에는 얼마나 시간이 지나야 나의 행동에 의해 아이의 안전과 건강이 좌우되지 않는 시점이 오는 것인지 막막함으로 앞이 캄캄했던 그 당시의 우울감은 꽤나 오래 지속되었다. 조리원에서 나와 집으로 돌아와서도 한참을 말이다.


재택근무를 하는 남편과 가족들의 방문으로 조금은 나아졌지만, 코로나19에 대한 불안감으로 사람들 간의 적극적인 교류가 원활치 않은 상황에서 외출까지 제한되며 긴 터널은 계속 되었다. 다시 생각해도 참 어둡고 길었다. 하루가 다르게 자라나 나를 보며 방긋 웃는 아이를 보면 순간적으로 기분이 환기되었지만 이내 이 맑은 웃음을 진 아이가 자라나는 동안에 겪을 온갖 불행의 가능성을 타진하며 걱정과 막막함으로 먹구름이 몰려오는 듯한 기분이 아직도 생생하다.


둘째를 낳기로 결심했을 때, 그 터널 속 시간들이 가장 먼저 떠올랐던 것 같다. 다시는 돌아가고 싶지 않았던 시간이다. 꽤 긴 시간을 약 없이, 상담 없이 스스로 이겨내며 어느 정도 극복은 해냈지만 다시 돌이켜보아도 괴로운 나날들이었다. 아마 첫 아이를 키우는 5년 동안 잠깐씩 그 순간과 비슷한 때가 왔던 날들도 있었던 것 같다. 겨우 그 어둠을 지우고 나아지던 중에 다시 출산을 결심하는 것은 큰 결정이었다. 절대로 나 혼자의 생각으로는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고, 몇 번의 가족회의와 첫째 아이의 간절한 한마디 같은 결정적 사건으로 힘들게 마음 먹은 일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마음을 먹고도 한참을 두려웠다.

둘째가 세상에 나오고 이제 6개월을 지나며 돌아보니 그때와는 다른 양상임을 확인한다. 실제 이 산후 우울증은 첫째 아이에게서 심하게 나타나고 이후 경산모의 경우 조금 덜한 행태를 보인다고 한다. 그렇다고 둘째를 낳고나서 우울감 같은 건 깔끔하게 없다, 라고 할 수는 없다. 우울을 느낄 겨를이 없을 수는 있겠다. 그럼에도 정확히 산후 3주 정도가 지나고 그때처럼 막막한 감정과 막연한 불안의 그림자가 마음에 드리웠다. 괜히 눈물이 나왔고 아이를 안는 게 힘들었다. 엄마가 아이를 봐주시는 아침에는 첫째를 등원 시키고 나서 한 시간 남짓을 걷고 뛰었다. 그때 내가 풀과 나무의 초록과 하늘의 푸름에 얼마나 의존했는지 모른다. 평소 잘 듣지 않았던 수없이 많은 설교 말씀을 듣고, CCM을 들었다. 신앙의 힘이 아니고는 앞이 보이지 않는 나날들을 걸어갈 자신이 없었다. 그렇게 오전에 힘을 얻고 오후에 우울에 젖었다. 다시 아침을 맞으며 다시 드리워진 우울을 걷어냈다. 2~3주 정도 그런 시간을 보내면서 5월의 신록, 6월의 초록을 맞이했다. 정말 시간이 약인 일이어서 그렇게 마음 속 우울이 조금씩 나아졌다.


돌아보면 첫째 때도 다른 큰 것이 아니라 짧고 작은 환기로 그렇게 우울을 이겨 나갔던 것 같다. 가끔 주말에 부모님이나 형제들이 찾아와 아이를 봐주는 2시간 남짓한 시간 동안 남편과 한강으로 다녀오는 드라이브, 사람들을 피해 봤던 만연한 벚꽃, 차 안에서 먹은 달콤한 간식, 아이를 재우고 맥주 대신 먹으라고 동생이 집에 놓고 간 산펠레그리노, 아이가 자는 동안 틀어 놓은 디어마이프렌즈나 청춘시대 같은 드라마…그런 작은 것들로 우울과 싸웠고 이겼다.


나의 경우는 심한 정도가 아니었음에도 주변의 관심과 도움, 그리고 애정 어린 돌봄으로 산후우울증으로부터 살아남았다(그렇다고 말하고 싶다). 산후조리원 창문처럼 생명에 대한 안전장치가 필요할 정도로 심각한 산후우울증으로부터 살아남은 많은 엄마들은 나 뿐 아니라 내가 낳은 생명, 그리고 나를 바라보는 가족들을 돌보며 삶을 살아가야 한다. 아이를 낳지 않았다면 몰랐을 그 무게에 관해 이제 한 명의 서바이버로 이야기 할 수 있음에 어떤 묵직한 감정을 느낀다. 어두움을 딛고 밝게 선 어떤 감정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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