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에 진심인 사람은 진심인 사람을 끌어당긴다.
가끔 내가 왜 이 글을 적고 있나 생각할 때가 있다. 무엇을 적기 위해 자판을 두드리는지 알 수 없지만 기억나는 것들을 그저 정리하고 마무리 짓기 위한 것이라 생각한다. 나에겐 정리해야 할 시간들이 필요했다. 40대를 불혹이라고 부른다. 40 정도면 유혹에 흔들리지 않는다 하여 그렇게 부른다고 한다. 하지만 나이를 거꾸로 먹었는지 작은 바람에도 적잖이 흔들거리는 마음을 바라본다. 이 생의 반치나 살아왔음에도 여전히 나를 찾지 못한 내 모습들에 한탄할 때가 있다.
그랬다. 나는 흔들릴 때마다 글을 썼다. 가슴속 절절히 흐르던 연민에 관하여, 세상은 불공평하고 아주 엿같다는 식의 대상이 없는 분노에 대하여, 매일같이 토해내도 뭐가 그렇게 억울하고 분했던 건지 알 수가 없지만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살 수 없을 것만 같았다.
잘나고 싶고, 잘하고 싶었던 마음이 왜곡되고 비틀어진 모습으로 나타난 사람들, 그래 그게 바로 나였다. 그땐 그렇게라도 안 하면 매일 죽고 싶은 마음과 싸우느라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몇 년을 미친 듯이 글을 썼다. 내 또래 다른 친구들이 자기 일에 집중하며 자기 성장을 위해 고군분투할 때 나는 오히려 뒷걸음질 치며 도망치고 있었다. 나에 대해여, 삶에 대하여...
눈물로 지새우는 시간이 길어졌다. SNS 속 화려한 사람들의 모습을 동경하였고, 그들이 누리는 것들을 무척 부러워하였다. 부모를 잘 만나서 호사를 누리는 사람들, 행복해 보이는 사람들 속에서 나는 점점 더 의욕을 잃어가고 있었다. 다시 하면 된다는 그들의 말도, 일어나 보라는 응원의 말에도 화가 났다. 아무와도 마주치고 싶지 않았다.
난 철저하게 고립을 선택했다. 우울증이었다.
소위 그들이 말하는 찐따 같은 사람... 더 이상 회생불가능한 사람.
삶의 유한함을 알면서도 내 삶 따위에는 안중에도 없었다. 아주 오랜 시간 습관처럼 굳어진 신념이며 행동들로 굳어져 버렸다. 마치 나는 그래도 되는 사람처럼... 그렇다 사람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 죽을 만큼 힘든 사건을 만나거나 큰 충격을 받지 않는 이상 기존 습관으로 돌아가려는 관성의 법칙이 의지의 힘보다 언제나 앞서니까.
그렇게 몇 년간 자기 비하성 글, 남 탓을 늘어놓거나 감정 섞인 글들만 퍼부어댔다.
그러면 그럴수록 삶은 처참하게 무너져 내렸다. 사람관계도, 가정도, 건강도, 나도...
그러다 내 인생에 절대 일어나지 않을 거라 생각했던 가장 큰 사건이 벌어졌다.
암과 이혼의 시간이었다.
그때 내가 미처 알지 못한 것들,
보지 못한 것들이 눈에 들어왔다.
나였다.
세상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가장 소중하게 지켜줘야 할 사람...
그래, 사람이었다.
그때부터 타인이 보였다. 내가 지켜내고 아껴줘야 할 사람
내 곁을 지키오던 내 사람들... 그날 이후로 모든 것이 변했다.
말끔히 정돈하고 내일을 준비하기 위한 의식적인 글쓰기가 시작됐다.
아마도 그때 이후로 나의 모든 삶은 변했다.
그날 알았다. 끌어당김의 법칙에는 예외라는 게 없었다는 것을
내가 무엇을 끌어당기고 살았는지 처참하지만 현실속에 모든 것이 펼쳐저 있었다.
더이상 이대로 멈출 수 없었다. 나는 다시 살고싶었다.
어제까지 죽지 못해 안달난 사람처럼 울며불며 못한다던 사람이 한순간 나의 모든 과거들이
다르게 펼쳐지기를 바랬다.
신께 빌었다. 잘못했다고, 다시 한번 내게 기회를 달라고...
아픔을 딛고 이전에 내가 그리던 것들을 그리며 하루하루를 맞이한다.
틈틈이 책을 읽고, 생의 아름다움을 담아 낼 글을 쓴다.
비로소 희망이 어디에 있는지 눈을 뜬 것이다.
성장, 내면 공부, 자기 관리, 자기 앞의 삶을
성실히 살아가고자 하는 사람
그렇게 자신의 인생을 진심으로
살다 가고자 하는 이들이 끌려온다.
진심은 언제나 진심을 끌고 온다. 보고 싶은 마음, 잘하고 싶은 마음, 그래서 자기 삶을 잘 살수 밖에 없도록 매일같이 노력하는 사람은 꼭 자신을 닮은 사람을 끌고 온다.
누구라도 잘 살 수밖에 없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