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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ity May 18. 2022

기분과 귀찮음

어중간한 시간에 배에서 신호를 보낸다. 그래서 텀블러에 얼마 남지 않은 물을 다 마셔버리고, 나를 보채는 애처로운 소리를 무시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기분이 처지고 무력감이 든다. 그래서 다시 물을 마시려고 텀블러를 들었는데 허전하다. 상당히 오래 앉아 있어구나. 의자에서 일어나 뻐근한 허리를 이리저리 돌리고, 싱크대로 다가갔다. 텀블러에 물을 가득 따르니, 물통이 바닥을 보인다. 이게 500ml? 정수통을 들어 물통에 붓고, 수돗물을 틀어 정수통에 물이 찰랑할 때까지 부었다. 정수통 뚜껑을 보니 게이지가 한  칸 남았다. 일주일에 뒤에 바꾸면 되겠군...


일어난  김에 허전한 뱃속에 뭐라도 넣을까 하고 냉장고를 열어봤다. 창백한 백색 공간이 휑하다. 반쯤 먹은 커피 500ml. 푸석한 얇은 비닐 속 오렌지 두 알. 그리고 김치와 아직 포장된 채 그대로인 계란 12개. 응? 딸기잼이 있어구나? 유통기한은 걱정 안 해도 되겠지? 이사 온 지 얼마 안 됐으니... 편의점에 빵을 팔던가?... 바닥에 낮게 깔리는 서늘한 냉기를 발등을 느끼며 쓸데없는  생각을 했다. 응? 그런데 이 녀석은 삐삐 거리지 않네? 집에 있던 건 조금만 열어놔도 칭얼거렸었는데...


계란  프라이는 프라이팬이 없고, 딸기잼은 편의점 가기 귀찮고, 오렌지는... 귀찮다. 라면이나 부셔먹을까? 다시 멍하니 냉장고에 기대  있다가 야트막한 알루미늄 선반 위에 돌돌 말린 후레이크?를 발견했다. 고개를 끄덕이며 싱크대 그릇 선반에서 물이 뚝뚝 떨어지는 하얀 국그릇을 집어 들었다. 그릇을 들어 대충 툴툴 털어 물기를 날려버리고, 후레이크를 가지러 갔다. 


바스락. 다소 경박한 소리를 내며 돌돌 말린 포장지가 요란스레 펴진다. 구깃구깃한 후줄근한 비닐 입구를 그릇에 가져다 대고 탈탈 털었다.  촤르륵... 그릇을 살살 흔들어 쏟아진 량을 가늠하고, 다시 후레이크 봉지를 감았다. 귀를 거스르는 소리를 무시하며 둘둘 감아  다시 제자리에 올려놨다. 풀리진 않겠지? 뭔가 거슬리지만, 테이프를 찾아 붙이기는 좀 유난이다 싶어 돌아섰다. 후레이크가 적당히  담긴 그릇을 올려놓고, 다시 후레이크를 올려놨던 선반으로 돌아섰다.


후레이크를 그냥 먹어도 되지만, 다 우유에 먹으니 나도 ... 두 번째 칸에 비닐 랩이 여전히 팽팽한 멸균우유박스?에서 하나를 뺐다.  음... 대충 6개 먹었나? 앞에서 두 칸이 비었으니 6개 맞다. 그리고 신발장으로 가서 커터 칼을 꺼냈다. 멸균우유는 일반  우유팩처럼 주둥이를 벌려서 여는 게 아니고, 빨대로 꽂아 마시기 때문에 그릇에 따르려면 뭔가 자를게 필요하다. 당연히 나에겐  가위가 없다. 그리고 식칼도 없다. 하지만 커터 칼은 있으니...


우유 테두리를 들어 올려 칼집을 조금 내고, 칼날에 우유가 묻었나 확인 후 다시 신발장을 열었다. 그리고 싱크대로 가서 꼴꼴꼴 우유를 따르고 빈 우유통을 빈 라면 박스에 던져 넣었다. 귀찮지만, 컨디션을 올리려면 어쩔 수 없다. 책상에 올려놓고, 먹....  숟가락?! 아아.... 귀찮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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