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어릴 적 외가댁 방문 기억은 단 하나다.
엄마의 삼십 대, 외할아버지는 건강이 나빠지자 사업을 정리하시고 잠시 울릉도에 사셨다. 아버지는 엄마가 집을 떠나는 걸 극도로 싫어하셨기에 감히 먼 울릉도에 있는 친정에 간다는 말은 꺼내기도 힘든 상황이었다. 엄마는 친정아버지에 대한 염려와 애틋함으로 아버지와 긴 실랑이를 벌이셨다. 몇 달간의 신경전 끝에 마침내 친정행을 허락받았고 우리는 엄마를 따라 울릉도 외갓집으로 나섰다.
출발이 순탄한 것은 아니었다. 할머니는 한 달 동안 집안 살림을 비우고 친정 가는 며느리가 못마땅하셔서 잘 다녀오라는 말도 없이 찬바람만 쌩쌩 날리셨다. 아버지는 엄마가 무슨 선녀라도 되는지 우리 사형제 중 하나는 집에 두고 가라고 하셨다. 그중 셋째인 여동생이 뽑혔고 초등학교 1학년이던 동생이 우리가 떠나던 날 골목이 떠나갈 정도로 울며 엄마 치맛자락을 잡고 놓지 않았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고 동생의 황망함에 가슴이 아리다. 아버지의 정신구조를 아직도 이해하지 못하겠고 동의할 수 없는 사건이었다.
엄마는 탈출하듯이 집을 떠났고 우리는 울릉도로 향하는 배를 탔다. 포항에서 열두 시간을 타는 작은 배는 그날 세차게 부는 바람에 심하게 흔들렸고 나는 계속 먹은 것을 토하면서 선실 바닥을 뒹굴었다. 엄마는 어린 동생들을 돌보느라 나에게는 신경 쓸 여력이 없으셨고, 나는 눈물 콧물을 흘리며 울면서 괴로운 시간을 보냈다.
그렇게 도착한 외갓집
그곳에서 한 달은 나에게는 먼 이국의 추억처럼 내 인생에 전혀 다른 색상의 추억을 선사했다. 아침 일찍 김밥을 사서 식구들이랑 올랐던 산행은 열대의 원시림을 헤맨 듯하다. 한참을 올라가면 화전민이 있었고 점심을 먹고 있던 그들 가까이 우리도 점심 보따리를 풀었다. 꽁보리 감자밥에 된장이 전부인 그들의 먹을거리를 엄마는 반색하며 김밥과 바꾸어 맛있게 드셨다. 마치 우리가 화전민이 된 듯한 기억이다.
낮에는 외갓집 옆 초등학교에 동생들이랑 나가서 놀곤 했다. 그곳에서 만난 내 또래의 여자아이는 나와 친구가 되었고 거의 매일 같이 놀았다. 돌자갈이 깔린 바닷가에 가서 불을 피우고 대충 만든 얼겅설겅한 석쇠로 자기 아버지가 갓 잡아온 오징어를 구워 주었는데 그 단백질이 오그라들며 타는 냄새와 달고 쫄깃하고 바다 냄새가 나는 항홀한 맛을 잊을 수가 없다. 바닷가에 누워 밤하늘의 그토록 총총한 별들에 무서울 정도의 경외감을 가졌던 기억들은 마치 먼 이국의 섬 바닷가에서 캠핑을 한 듯 남아있다.
그때까지 엄마에겐 친정은 나의 추억 속의 울릉도와 같은 존재였을지도 모른다. 어릴 때의 추억이 있는 먼 이국의 섬처럼 동경하며 십여 년 동안 감히 가보지 못했던 그곳, 뛰어놀던 뜨락의 황국 화가 아름답게 가슴에 남아있던 곳. 힘들고 고달플수록 더욱더 그리워했던 어린 시절의 아름다웠던 추억이 거의 환상으로 변해 가고 있던 곳이었을 것이다.
울릉도에서 한 달 동안 내내 엄마는 외할머니 치맛자락만 졸졸 따라다니셨다.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밤이 새는 줄 몰랐고 할머니가 해주시는 일본식의 찬을 맛있게 드셨다. 어릴 때 일본에서 사셨던 엄마에게 그 음식은 추억을 그대로 소환하는 맛이었다. 우리가 밖으로 나가서 늦게 돌아다녀도 찾지를 않았다. 마치 어린아이가 된 듯 그저 할머니만 있으면 되었다. 자식 넷의 엄마가 아니라 어린 시절의 원자(엄마 이름)로 돌아간 듯했다.
시집의 눈치도 남편의 간섭도 없고 안부 전화조차 주고받을 수 없었던 그 고립된 섬이 엄마에게는 결혼 후 처음 맛보는 자유였을 것이다. 돌아가고 싶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마지못해 떼어 놓았던 둘째 딸이 눈에 밟혔을 것이다. 아버지는 그것을 알고 여동생을 떼놨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그 이후로 엄마는 이러한 친정 행을 하신 적이 없다. 외갓식 구들이 대구로 이사 오셔서 가까이 사셨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나이가 드시면서 삼십 대의 한 번도 가보지 못한 친정에 대한 마음, 어린 시절의 향수, 현재의 도피처였던 그 울릉도 친정은 그때로 막을 내리고 현재의 삶에 더 집중하게 된 것 같다. 맏이로서 친정동생을 돌봐야 할 책임감으로, 아프고 병든 부모님을 보살펴야 할 의무감으로 열심히 자신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신 삶을 살았던 것 같다.
친정 생각
삼십 대
일손 틈틈 놓고 앞산을 바라본다
뛰어놀던 뜨락엔 황국화 만발하겠지
가없는 어버이의 뜻 이제야 깨닫다니
사십 대
큰딸 시집보내고 작은딸 보낼 때에
심장 하나 떼어주고 애타는 간장 떼어줬다
울 엄마 세 딸 보낸 때 삔 껍질만 남았겠지
오십 대
임종 못한 어머니 한으로 묻혀 있고
홀로 계신 아버지 큰 짐 되어 계신다.
가슴에 내 가슴 안에 친정집을 지었다.
-나의어머니 시인 김원자 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