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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곽나영 Feb 21. 2022

4. 종교전쟁




  후루룩 후루룩 종이가 불이 붙어 재와 연기를 날리며 날아다닌다. 쪽머리에 흰 소복을 입은 무당이 한 손에 버드나무 가지를 흔들며 주문을 외운다. 부엌에 갔다가 뒷간으로 안방으로 집안 구석구석을 버선발로 다니며 버드나무 가지를 흔들더니 얼굴에 땀을 닦으며 대청마루에 털썩 앉는다. 할머니는 따라다니며 두 손을 모으고 머리를 조아리며 같이 기도를 중얼중얼하신다. “이제 이 집에 야 소귀 신 다 떠났다” 하고는 짐을 챙겨나간다. 마당 한 구석에서 겁에 질린 듯 서있는 엄마는 무서운 시어머니의 기세에 눌려 아무 소리도 못하고 있다.


  아들이 예수 믿는 며느리 데리고 왔다고 마뜩잖아하시던 할머니. 겨우 사십에 혼자되시고 자식 여섯을 행상으로 키우시면서 뚜렷한 종교는 없으셨다. 그런데 예수 믿는 며느리가 들어오자 집안 망한다고 갑자기 맹목적인 불교 신자가 되었다. 어릴 적 고향에서 야소교 믿는 것들이 제사도 안 지내고 동네에서 돌림을 당한 일을 기억하시는 할머니에겐 엄마의 존재는 집안을 망칠 수 있는 위협이었다. 믿고 의지하던 아들마저 예수쟁이가 될까 봐 생사를 걸고 며느리를 단속하셨다. 아버지와 교회에서 만나 연애하고 결혼한 엄마. 친정이 목사와 순교자를 줄줄이 배출한 명문 기독교 집안이었건만 할머니의 적대적인 종교탄압에 꼼짝도 못 하고 교회 근처에도 못 갔다. 그리고 십여 년. 할머니가 육십이 되어가고 엄마의 자식들이 커면서 좀 든든해진 엄마는 이제 교회에 가야겠다고 결심을 했다.


  새벽이면 엄마는 나를 깨우고 새벽기도에 데리고 갔다. 부흥회가 있으면 아무리 멀어도 나를 데리고 다녔다. 아버지가 엄마 혼자의 바깥 외출을 싫어하신 탓에 나는 엄마의 종교행사마다 따라다녔다. 며느리가 교회 다니는 걸 눈치챈 할머니는 이마에 흰 천을 두르고 며칠을 굶으시며 시위하셨다 “아이고 우리 집 망했다” 집안에 떠나가도록 꺼이꺼이 울던 모습이 무섭고도 싫었다. 나는 주일학교에서 주는 간식과 선물이 좋아서 몰래 교회에 가곤 했다. 다섯 살 터울의 작은 고모는 나를 살살 따라와서 교회에 들어가는 것 확인하고 자기 엄마에게 일러바쳤다. 아무 생각 없이 사탕을 빨고 대문을 들어서면 할머니가 싸리 빗자루를 들고 무서운 눈으로 나를 보시고 계셨다. 나는 뒷간으로 끌려가 엉덩이며 장딴지가 시퍼렇게 되도록 매를 맞았다. 


  벼게잍 송사라 하지 않았는가. 엄마가 아버지와 쌓은 만리장성을 할머니는 넘지 못하셨다. 아버지는 엄마와 함께 교회 나가시더니 장로가 되고 교회의 중심 역할을 하시게 되었다. 당연히 일요일이면 집안은 냉전과 열전이 교차하는 전쟁터였다. 그럴수록 엄마는 커가는 자식들의 문제와 자신의 종교적 소신으로 밤을 새워 기도를 하기 시작하셨다. 방언을 하는 엄마의 기도는 어릴 적 무당이 주문을 외는 모습과 겹쳐져 신기하면서 기이했다. 엄마의 기도로 밤잠을 설치신 할머니는 며칠씩 딸네 집에 가셔서 머무르시곤 하셨다. 할머니가 점점 연세가 드시자 본인의 제사 밥은 이 집에서 얻어먹기는 틀렸다고 생각하신 듯했다. 통장에 돈을 모으시기 시작했다. 절에 본인의 제사를 의탁할 요량으로 꽤 많은 저축을 해 놓으시더니 독립을 선언하셨다. 몇 달간의 실랑이 끝에 결국 근처 아파트로 거처를 옮기셨다. 야소쟁이들과 한 집에 살면 본인의 몸이 아프고 오래 살지 못할 것 같다는 주장이었다.


  엄마는 자식들이 결혼을 할 때마다 할머니와 부딪히셨다. 할머니는 중매쟁이들에게 받은 사주로 궁합을 맞추어 보시고는 반대를 하시면서 손자 손녀들의 혼사에 개입하셨다. 그 덕에 나는 선을 수십 번 보았다. 할머니가 좋다고 하시면 신랑감이 교회에 안 다닌다고 엄마가 반대하셨다. 결국은 엄마의 의지대로 동생들은 전부 독실한 기독교 집안과 혼사를 맺었다. 나만 교회에 다니지 않는 집안의 남자와 연애결혼을 했다. 결국 엄마는 사위에게 평생 교회에 다니겠다는 약속을 받아내고 결혼을 허락하셨다.


  아버지의 사업이 예전 같지 않게 되자 아버지는 할머니 탓을 했다. 자식이 교회 다니는데 엄마는 절에 다니니까 일이 안 풀린다고 하시면서 구십이 다된 할머니에게 교회 다닐 것을 종용하셨다. 할머니는 기가 막혀하면서 대꾸도 안 하셨다. 결국 아버지의 사업이 정리단계가  되자 대구를 떠나 고향으로 가셨다. 할머니는 혼자 아파트 생활을 고집하시다가 경제적으로 힘든 아들의 부탁을 거절할 수가 없어서 같이 시골로 가셨다. 시골생활은 할머니에게 고립이었다. 자신이 살고 다니던 모든 장소 사람들과 다른 곳에서 적응하시가 힘드셨고 몸과 마음이 노쇠해 가셨다. 무엇보다 자식의 몰락을 바라보시는 심정이 가장 힘드셨을 거다.


  할머니가 돌아가시기 이년 전부터 교회에 나가기 시작하신다는 말을 들었다. 명절 때 부모님을 뵈러 가면 할머니는 작고 컴컴한 방에 홀로 계셨다. 용돈을 드리고 말벗이라도 되 드리려고 그 방에 들어가면 할머니의 눈빛은 거의 빛을 잃고 계셨고 손은 말라서 사간 음료수 병도 못 따고 덜덜 떠셨다. 얼마 남지 않은 자신의 길을 짐작이라도 하셨는지 그렇게 나를 붙잡고 이런저런 이야기로 놓아주지 않던 할머니가 말문을 닫으시고 그저 내 말에 빙그레 희미한 웃음만을 지으셨다. 노쇠한 영혼은 더 이상 싸울 힘도 마음도 놓으신 듯했다. 그리고 비로소 아들이 보이고 아들의 마음이 보이고 그를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드셨나 보다. 그렇게 목숨을 걸고 싫어하고 반대하던 야소교 예배당을 가시는 걸 보면 모성이 종교를 초월했나 보다. 돌아가신 할머니의 방구석엔 일요일마다 교회에 들고 가시던 엄마에게 받은 성경책과 찬송가를 담은 구찌백이 놓여있었다.


  엄마는 자신이 승리한 듯 할머니의 교회가 신 이야기를 여러 번 하셨다. 하지만 할머니의 진심은 아신 듯하다. 아들에게 더 이상 짐이 되지 않고 조금이라도 위안이 되고 싶어서 한 희생이었다는 것을. 엄마는 우리가 교회 다니지 말라고 하고 종교를 바꾸라고 한다면 어떨 것 같냐는 질문에는 아무 대답도 안 하셨다. 할머니는 전쟁에서 지신 게 아니라 모정으로 그 전쟁을 끝내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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