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시한 어른
가장 후회되는 것이 뭐냐고 묻는다면 나는 여행을 자주 다니지 않은 것이라 대답하겠다.
열몇 살 때쯤. 나에게 있던 취미는 멋진 풍경 사진을
모으는 일이었다.
이름 모를 광활한 들판이나, 푸르른 숲 속, 해외
어느 관광지를 잘 찍은 사진 따위를 컴퓨터 폴더에
'여행'이라고 저장해 두고 달달한 것을 꺼내먹듯
종종 열어보며 자주 감탄했다.
국내 사진은 대관령 양 떼 목장, 담양 죽녹원, 보성 녹차밭 같은 것이 있었고, 국외 사진으로는 네덜란드 사진이 주를 이뤘다.
네덜란드에 꼭 가고 싶다는 마음으로 풍차나 튤립, 운하 사진을 모았는지, 그런 것들을 보다 보니 그
나라에 한 번쯤 가고 싶어 졌는지는 모르겠지만,
심심할 때면 네덜란드의 문화나 기후, 인사말 같은 것을 찾아보기도 했다.
발바닥은 장판 바닥에, 엉덩이는 흔들거리는 컴퓨터 의자에 붙어있으면서도 그런 것들을 찾아보는 시간에는 여행이랄 것이 꽤 현실적으로 느껴졌다.
"Hoi!"
네덜란드에서 만날 때 쓰는 인사말이라던데,
입 밖으로 내 본 적은 없다.
Hoi. Hoi. 마음속으로 웅얼거려본 게 전부다.
열몇살쯤에는 내가 어른이 되면 국내 여행지는 물론이거니와 네덜란드도 갈 수 있게 될 거라고 생각했나 보다.
뭐든 꿈꾸는 열몇살이었을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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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석하게도 '여행' 폴더에 있는 사진 중 내가 가봤던 곳은 대관령 양 떼 목장과 담양 죽녹원뿐이다.
그 마저도 대관령은 타의에 의한 단체 여행이었고 그날따라 안개가 자욱하게 껴서 사진에서 보던
널따랗고 푸른 풍경은 볼 수 없었다.
내가 중학생이고 여름방학을 보내고 있을 때,
아빠가 하루는 어디에 가고 싶냐 하시길래 냉큼
담양 죽녹원에 가고 싶다고 했다.
그래도 가장 기억에 남는 여행이 언제냐고 묻는다면 그 해 여름방학 죽녹원이라고 대답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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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착한 죽녹원의 이곳저곳을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두 명 정도 사이좋게 걸을 수 있는 폭의 길이 대나무 사이로 나있고 바람이 불면 대나무가 서로 부딪히며 시원한 소리를 냈다.
대나무 숲 중간쯤에 있는 대나무 공예품 전시관에
들어가 구경도 하고 팸플릿도 가져왔다.
죽녹원을 배경으로 찍은 영화 포스터들도 걸려
있었는데 모두 내가 봤던 영화들이었다.
영화 속 장면을 되짚어 보기도 하며 여기에 걸려있는 영화들을 내가 다 봤고 나는 폴더 속에 저장해둔 여행지에도 오는 대단한 뭔가가 된 것 같아서 우쭐하기도 했다.
그리고 돌아오는 길에 아빠 차가 도로에서 멈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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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은 유독 더웠고 차는 에어컨까지 고장 나서
정말 딱 죽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지만 오늘의 여행을 망치고 싶지 않아서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견인차가 오고 아빠와 나는 모르는 기사 아저씨
옆자리에 나란히 앉아 우리 차를 질질 끌며 정비소로 향했다.
정비소 안쪽 사무실에서 이글거리는 바깥 도로와 고장 난 우리 자동차를 바라봤다.
집에 돌아갈 수 있긴 한 걸까.
배가 고프다.
괜히 왔나.
속상하다.
팸플릿을 쥐고 그런 생각들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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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행인지 다행인지.
남편은 모르는 곳에 가는 걸 싫어한다.
음식점도 가봤던 곳에 잘 가고, 여행도 지리를 잘
아는 곳으로만 다닌다.
나는 '여행'폴더와 한걸음 더 멀어진 것이다.
여행이라는 것이 주는 것보다 내가 감수해야 하는 금전적, 일상적 변수들의 수지 타산을 가늠하는
시시한 어른이 된 나는, 아이들도 셋까지 키우니
여행을 못 가고, 안 가는 좋은 핑곗거리까지 생겼다.
그래도 여행을 가고 싶어질 때면 그런 저런 핑계를 눈앞에 들이밀며 자주 스스로를 위로하지만
어쩌면, 아니 정말로 죽을 때까지 네덜란드에 갈
일은 없다고 스스로 단정 지을 때면 조금 울적해진다.
친구에게 '여행의 이유'라는 에세이를 추천받았다.
하지만 그런 책만으로도 여행은 필요 이상의
행복과 자유로움을 부추기기 때문에 내가 미루고 숨겨두고 덮어두는 것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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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그때 즐거움을 누리고 살아. 나중에 나중에는 없어. 일단 이번에 즐겁게 어디든 다녀오고, 또다시 삶을 살고 그렇게 해야 되는 거야."
아빠가 지금도 종종 나를 보면 하시는 말씀이다.
날이 좋아지니 이번 주말에는 뭘 할까, 어딜 갈까
하면서도 셋째가 콧물이 심하니까, 이번 달은 돈이 모자라니까 하며 집 앞 놀이터에서 쨍쨍 해를 쬐고 있는, 어쩌면 아빠가 걱정하던 현실적이고 시시한
어른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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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글거리는 도로와 고장 난 자동차,
그럼에도 시원함만 남은 죽녹원.
본 적 없는 운하, 풍차, 튤립 같은 게 나에게서
한걸음 더 멀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