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발아나무 Jul 16. 2024

상실의 시간을 건너는 중

나의 몫

돌아보니 어느새 일 년이 다 되어간다.

브런치에 '사별로 남은 자'의 상태를 쓰기 시작하여, 지금까지 그리 성실한 글쓰기쟁이는 되지 못하였더라도, 이 덕분에 나는 세상에 내 마음을 내보이게 되었다. 창 안에서 창 밖으로 마음이 걸어 나오기까지 '사별에 대한 마음 쓰기' 과정을 거치지 않았더라면 나는 아직도 창 안의 깊은 우물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을 것이다.


삶과 죽음에 대해, 사별에 대해 답을 얻은 것이 아니다. 이 풀 수 없는 영원한 과제를 어느 종교학자가, 생명공학자가 말한들 답이 아니다. 우리는 수많은 죽음의 형태를 목도하면서 사람의 생명이든, 다른 생물의 생명이든 살아있지 않음은 슬픔이고, 그의 세계가 사라진 것이며, 살아있음은 어떤 식으로든 삶이라는 목적을 향해 자기 세계를 열어간다는 것을 안다. 오로지 자기 앞에 주어진 삶에 직면하여 '산다는 게 뭔지' 라는 탄식 어린 그 말을 마지막 지점까지 밀고 간다는 것을 안다. 


사별의 상실감을 애써 치유하려들 필요는 없다. 상실의 아픔은 각자의 몫이다. 가족끼리도 나눌 수는 있어도 각자의 몫이고, 사별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도 각자의 위치에 따라 다르다. 극복이든, 외면이든, 치유라고 하든, 위로를 받든 각자의 몫으로 남는다.

사별한 자를 바라보는 이웃의 시선도 사별한 자가 맞닥뜨려야 할 시선이다. 그들 역시 사별한 자를 바라보기가 부담이 되는 어느 시기까지가 있다. 시간이 약이라며 시간이 흘러가면 괜찮다고 조심스럽게 등을 두드려주는 그들의 손도 무겁다. 이런 이웃들의 위로는 고마움이 틀림없다. 그리고도 내 몫의 위로는 따로 있다. 


결국은 스스로 길을 찾게 된다. 내 몫의 위로는 나에게서 나온다.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이 사별의 사실과 상태를 직시하는 것이다. 그건 오로지 자신만이 할 수 있다.

스스로 이 아픔을 외면하지 않는다면 아픈 자신과 마주할 수 있다. 시간이 지났으니, 충분히 슬퍼했으니 이제 괜찮아 하는, 그런 것이 아니란 건 자신이 가장 잘 안다. 안으로 곪아 아무도 보지 못하는 한 덩어리가 구석진 곳에서 어느 순간마다 나를 끌어내리고, 한 발짝 나가면 반 발짝 뒷걸음질 치게 한다. 그것이 사별한 자의 상태인 것이다. 그런 나를 객관화해야 한다. 


드러내 보이는 것이 뭐 그리 중요할까? 중요하다. 묻어 둔 아픔은 사별로 남은 자들의 영혼을 어두운 창고에 묻어두는 것이다. 특히 자식을 잃은 엄마의 '가슴에 묻는다'는 말이 얼마나 인생을 송두리째 가둬놓는 말일지 짐작도 하기 힘들다. 

어떤 방식으로든 드러내 보이는 것은 나를 세상에 다시 걸어 나오게 한다. 가둬 둔 말을 나에게서 끄집어내어 밖을 향해 풀어놓는 이 용기가 상실의 강을 건너가게 한다. 대부분은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질 것이라고 하지만, 엄밀히 말하자면 시간이 진정한 약이 되지는 않는다. 오로지 내가 내 상실을 직면하고, 이것이 어떤 것인지 말할 수 있을 때, 나는 나로부터 나올 수 있다. 


상실의 아픔을 건너는 중인 사람은 이제 태어나서 돌 지나 막 걸음마를 하는 아이와 같다. 

조심스럽게 한 발 내딛고, 넘어지고, 울음을 참다 울고, 그리고 아픈 손을 털고, 그리고 잠이 든다. 자고 일어나면 아주 조그맣게 발이 자라 있고, 보이는 창이 더 커졌고, 창 밖은 더 넓어졌으며, 살랑거리는 바람이 눈에 들어온다. 무감하던 구름이 은은하게 보이고, 스치는 바람이 문 밖으로 나를 끌어당긴다.

지금 나는 상실의 낯선 끄트머리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따라 문 밖으로 한 발을 내밀었다. 낯설다. 겁날 것도 없지만 그리 호기심이 들지도 않는다. 하지만 나는 지금, 세상에 처음인듯 '툭' 하고 떨어져, 서 있다.

'툭' 하고 떨어져 서 있는 시공간. 여기서 다시, 나와 세상을 본다.


어느 날 갑자기 맞이하게 되는 죽음, 어차피 죽게 되는 수많은 죽음들 때문에 삶이 허무하거나 하찮아지는 건 아닐 것이다. 살아있는 동안 우리가 하게 되는 너무나 열심인 욕망, 투쟁, 고뇌 그리고 느림조차 치열한 생존의 미학이다. 허무하다고 그만두면 끝내 알게 되지 못할 이런 삶의 미학 앞에서, '넌 그렇게 아등바등하며 살더니, 이렇게 죽을 걸 모르고' 라며 그 삶이 허무하다고 말할 것인가. 하찮아지지 않기 위해 우리는 얼마나 열심히 살아 왔던가.

광활한 우주의 티끌 같은 존재라고 비유하는 '나'와 '나의 삶'. 이 티끌 같은 존재의 영혼으로 광활한 우주를 보고, 희로애락과 아름다움을 탐미(耽味)하지 않는 사람은 없으니 결코 작거나, 하찮거나, 그저 그렇게 살다갈 뿐인 것은 아니다. 이 상실감 속에서도 내가 느끼는 아픔과 삶과 죽음이 뭔지 몰라 몸부림치는 내가 하찮다고 느껴지진 않았으니.


그렇게 내 안에 갇혀있던 상실의 아픔이 무엇인지 드러내 보이고 세상에 한 발 나와 보니, 비로소 죽음이 남긴 것이 보인다. 일찍 간 그의 삶이 허무하거나 하찮은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남편은 자신의 꿈과 가족을 위해 치열하게 살았다. 그렇게 일찍 가다니, 허무하게. 누군가는 그렇게 말할지도 모르지만 그렇지 않다. 살아 있는 동안 정말 열심히, 진정으로, 선하게 살았다. 때문에 그 만큼 그의 삶은 허무하지 않다. 뜨겁고 빛나는 것이었으며, 든든한 그리움이 되어 있다. 갑작스럽게 온 병이 그를 데려갔다고 치열했던 그의 삶이 허무해지는 건 아니다. 이룬 것이 없다고 하찮은 것이 아니다. 선하고 치열하게 산 삶의 기억을 남기고 갔다.

그러니 나에게 그렇게 살라 한다.


삶과 죽음의 관계는 아무리 생각해 봐도 잘 모른다. 죽음 이후에 어디로 가는지, 그것으로 끝인지. 그렇다고 삶을 알까. 오래 살아 본 사람들이 거의 공통적으로 하는 말은 '그냥 산다'이다. 저절로 삶을 멈추는 상태가 되기까지 '살다'를 진행하는 것이다.

사차원 세계가 아닌 이상 우리는 이 원초적인 '삶과 죽음'이란 질문에서 벗어나지는 못한다. 생물학자들은 말하기를 삶에는 의미가 없다고 한다. 생명활동에 의미가 부여되어 있지 않다는 말이겠다. 그저 세포들이 충실하게 자기 활동을 할 뿐, 그것의 집합으로, 형체로 나타난 우리 인간의 '삶'이란 것에 '의미'가 주어져 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사회를 이루고 사는 인간 생명체들은 공존하는 삶, 지속되는 삶을 위해, 즉 이 생명체들을 유지해 나가기 위해  다양한 가치들을 추구한다고 본다. 

다시 말하면, '살다'의 진행을 연속시키고 싶은 원초적인 욕망이 내재되어 있는 것이 생명성이고 그 때문에 생명활동이 일어난다. 그렇다면 과거가 기억된 현재, 현재가 기억된 먼 미래의 현재는 생명활동의 연장으로 이루어진 시간일 것이다. 그러므로 모래알 같이 수많은 사람들의 삶과 죽음은 본연의 생명성을 다하는 것이지 허무하거나 하찮은 것이 될 수 없다. 공존하고 지속하는 생명성에 얼마나 선하게 활동하고 작용했느냐가 문제가 될 것이다. 이 시간이 선으로 진행될 때 생명은 미래의 지속을 담보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사별의 상실이 내밀화된 상태로 살아가는 일이 이제 나의 일이다. 나를 내팽개치지 않고, 삶이라는 질문 안에서 선한 시간을 살 것을 생각한다.


지난 일 년간 띄엄띄엄이라도 글 쓸 수 있었던 이 브런치 공간 덕분에 내 마음을 드러낼 수 있었다.

이 공간을 고마워하며 그리고 내 글쓰기를 회의하기도 하며, 더 가치 있는 글쓰기로 나아가야 함을 또 생각하게 된다. 

이전 13화 살아가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