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아 나무
나는 다시 처음이 되어 살고 있다.
같은 공간에서 밥 먹고, 자고, 일어나고, 소소한 집안일을 하고, 친구를 만나고, 티브이를 보고, 멍하니 창밖을 보지만 이전과 꼭 같지는 않다. 텅 비었던 마음이, 공허로 차 있던 마음이 조금씩 부피를 줄이고 있기 때문이다.
줄어든 그 자리에는 어제를 기억하지 않는 일상들이 오늘도 처음 진행되고 있다. 처음이니까 새롭고, 처음이니까 이다음이 있고, 처음이니까 어떻게든 지나가봐야 알 수 있다. 그 마음으로 마음을 내어 허공에 빠지지 않도록 조심조심 내 등을 두드린다.
나는 내가 어른인 줄 알았다. 나이를 먹고, 아이를 낳고 키우며, 직장생활을 무난하게 하며 살았으니 그만큼의 연륜으로 어른이 된 줄 알았다. 그러나 사별을 겪고 지금에서야 어른이 아닌 줄 알겠다.
소중한 것을 빼앗기고 우는 어린아이 마냥 허탈감에 빠진 나이 든 어린 아이다. 색즉시공 공즉시색을 머리로만 외워댔지 마음으로 알지 못하여 정작 일에 닥쳐서는 아무 생각도 나지 않고, 나는 색이고 너는 공이 된, 건널 수 없는 강만 내 앞에 가로놓여 있는 것을 눈물로도 감당하지 못했다. 지금도 나는 강가에 서 있는 어린 아이다. 다만 울지는 않는다.
사별한 남은 사람들은 어른이든 아이든 똑같다. 어른이든 아이이든 그냥 생명 가진 한 사람으로 잘 존재하는 것이 우선이고 최선일지 모른다.
초여름에 공선옥의 소설 < 선재의 노래 >를 읽었다.
참으로 놀라웠던 것이, 할머니를 잃고 천하 고아가 된 어린 주인공이 할머니를 여읜 슬픔을 놓치지 않으면서도 자신의 삶을 '선택'하는 과정이었다. 그때까지 어른이라 여긴 나보다도 사별을 받아들이는 13살 선재의 태도는 훨씬 명백한 모습으로 그려져 있었다. 몇 번이고 '내가 선재였으면 참 좋겠다'를 되뇌며 선재의 마음을 자주 생각했다. 살아지는 삶에서 살아가는 삶으로 선재처럼 마음을 바꾸어야 했다.
그래서 브런치에 글을 쓰기로 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즈음이었으니까. 억지로는 말고 무어라도 해보고, 내가 무얼 하면 되는지, 무엇을 하고 싶어 하는지 그때 다시 생각하기로 했으니까.
올여름 사회적으로 많은 죽음이 있었다. 사별이 개인적인 것이든 사회적인 것이든, 사별로 남은 가족들의 상태는 나 역시 그랬듯이 말로 할 수 없는 패닉 상태에 빠져버린다. 그 아픔이 보여서 가슴이 두근거렸다. 사별로 인한 고통을 써야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지금 글을 쓰고 있는 중이다.
지금까지 글을 쓰면서 나는 내 안의 공허를 만나고, 공허를 말하고, 그러면서 너는 왜 자꾸 공허하다고 말하느냐, 엄살 아니냐고 질책도 해보았다. 그런다고 있는 마음이 없는 것이 되진 않았다. 그리고 살아가는 일이 한꺼번에 무엇이든 확 바뀌지도 않는다. 마음대로 안 되는 게 마음 아닌가. 사는 일 아닌가.
그렇지만 조금씩 조금씩 내 사는 공간에 새로운 색이 들어온다. 어제의 반복에 가까운 일상에서 그 새로운 것이 뭐 그리 특별할까마는, 나는 안다. 나 같은 사람에겐 그 조그마한 변화가 어제와는 다른 엄청난 일이라는 것을.
밖은 바람이 세차게 불고 있다.
누구나 살아지는 것과 살아가는 일이 버무려진 하루들을 살고 있을 것이다. 내 하루도 이 세찬 바람 앞에 선 국화더미 마냥 일시정지와 바람 타기를 저항 없이 온순하게 이어간다. 그리 어려울 것 없는 살아지는 날들이 지나가고 있다.
오늘 아침에 마시는 커피는 어제의 발효차가 아니고, 오늘 걷는 산책길은 어제의 낙엽길이 아니다. 굳이 의미를 부여하자는 게 아니라 사실로 오늘 먹은 마음이나 느낌이 어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치매일지도 모른다. 그래도 괜찮다. 지워지는 기억이 건망증이나 치매라기보다는 아직은 망각력에 가깝다고 믿고 있다. 건강한 망각의 힘이 나를 살리고 살아가게 할 수 있다. 기억은 기억대로 망각은 망각대로 바람의 길을 따라 지나간다.
바람길을 열어주는 듯, 바람길을 가르는 듯, 원숙하게 윈드서핑을 하는 국화더미는 아직 꽃대 하나 부러지지 않았다. 밤서리를 맞고도 얼지 않고 살아서, 바람을 타며, 늦가을 짧은 햇빛에 보란 듯이 부풀어 있다. 국화를 키운 건 반의 반이 바람이다. 바람이 있어 날마다 싱그러웠겠다. 건들건들 피하기도 하고 바람을 살살 달래듯이 흔들리기도 한다. 둘의 장단이 늦가을도 가고 있음을 알린다.
<사별로 남은 자>도 이만큼에서 늦가을이다. 사별로 남은 나는 이제 새로운 겨울을 맞이한다.
나무의 씨앗이 떨어져 겨우내 땅속에서 보존되었다가, 이른 봄 드디어 세상 밖으로 터져 나오면 바람도 맞고, 햇볕도 받으며 봄비를 들이켠 후, 줄기를 뻗어 올린다. 그것이 발아 나무다. 겨울 땅속에서 죽지 않고 발아된 나무는 오래간다고 한다.
나는 나무가 좋다. 그 중 발아 나무라면 더 감탄스럽다. 모든 사별로 남은 자의 시간이 자연의 섭리 속으로 융화되어 발아 나무가 되는 날을 간절히 그린다. 내 삶도 발아 나무를 그려보며 처음이 되는 겨울을 잘 살아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