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기구가 사람의 사고를 지배할 수 있다.
나는 필기구에 민감한 사람이다.
시대의 구분법은 여러 가지가 있다. 지질학적 구분, 생물학적 구분 등등. 인간의 문명의 구분은 물질로 나누어, 석기 > 청동기 > 철기 > 플라스틱. 역사적 기록 유무에 따라 선사시대와 역사시대로 구분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역사를 기록한 도구로 구분하면 어떨까?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것은 내 사고가 필기구에 의해 크게 영향을 받는다고 생각해서다.
내가 공부를 할 때 가장 애용하는 것은 pentel P205 샤프.
샤프 안에 Pentel Ain 샤프심이 가득 들어있어야 공부에 집중이 잘 된다. 초등학교 때 운동장에서 우연히 주워서 써보게 된 것이 인연이 되어서 지금까지 함께하고 있다. 고마운 마음에 샤프심과 지우개까지 Pentel을 써 주고 있다.
공부보다는 좀 더 자유로운 생각을 표현할 때, 낙서나 그림을 그릴 때는 연필이 좋다. 필기감도 좋고 깎는 재미도 있다. 재밌는 상상은 연필과 잘 어울린다.
폼 나는 글씨를 쓰고 싶을 때는 만년필이다. 평소에는 악필이지만 만년필로 쓰면 글씨가 좋아진다. 글의 내용보다는 보이는 글씨가 더 중요하다면 만년필이 좋다.
만년필이 너무 거추장스러울 때, 적당히 격을 갖춰 문서에 서명할 경우는 볼펜이다. 중요한 선택의 순간, 오랜 고민 끝에 그 마침표를 찍기에 적당하다. 이름이 각인된 선물 받은 볼펜이라 더 각별하다.
종이가 아닌 화면에 글씨를 쓰는 시대가 되었으니 이젠 전자 펜슬도 중요한 필기구다. 손가락으로 터치할 수 있다고 해도 꼭 전자 펜이 있어야 마음이 편하다. 필기구는 내 생각을 담아내는 데 꼭 필요한 도구다.
역사시대, 문명의 기록 도구
역사의 기록은 암각화나 동굴 벽화같이 돌에 흔적을 내는 날카로운 도구(stylus)가 필기구의 시작이었을 것이다. 그다음 의미 있는 발전은 2세기 초에 종이가 발명되면서 필기구가 다양해졌을 것이다. 목탄, 붓 등. 서양에서는 6세기경 새 깃털이 잉크를 머금을 수 있는 것에 착안한 깃펜이 생겼다고 한다. 'Pen'이라는 단어의 어원이 새 깃털이라는 뜻의 라틴어 Penna에서 나왔다고 한다.
이 두 필기구의 차이는 글자 모양의 차이도 만들었다. 동물 털을 소재로 만든 붓은 비교적 자유자재로 종이 위를 오가며 쓸 수 있어 한자를 쓰기에 적합하고 획의 굵고 짧음, 농담의 표현도 쉽다. 그림과 글이 하나의 붓으로 쓸 수 있어 서예와 서화 등 예술적 표현 방법으로도 쓰였다. 하지만 깃펜으로는 획의 길이, 두께 조절, 필기 방향 전환 등 제약이 많아 알파벳이 단순해졌는데 이것이 나중에 전산화하기에는 도움이 되었다.
연필은 16세기 질 좋은 흑연이 발견되면서부터 사용되어 왔으나 흑연을 반죽하고 굽는 기술을 발전한 18세기 말에서야 대중적으로 사용 가능한 형태를 갖춘다. 하지만 르네상스 시기 지울 수 있다는 연필만의 장점 때문에 상상력을 필요로 하는 창작자들의 사랑을 받았다. 셰익스피어나 베토벤이 특히 연필을 애용했다고 하는데 연필로 표현된 것은 기록에 남기려는 목적이 아니라 전해 내려오는 기록물은 드물다고 한다.
19세기 초, 기록할 기술과 지식이 넘쳐나면서 기존 필기구의 단점을 보완할 필기구의 필요성에 의해 만년필이 개발되었다. 볼펜은 만년필의 문제점을 보완하기 위해 1938년에 나왔다. 볼펜은 잉크를 가지고 다니지 않아도 되는 장점과 필기 방향의 자유로운 덕분에 필기 방향의 제약이 있던 펜촉과 만년필에 맞게 발달한 필기체 글자는 사용가치를 잃어가면서 최근에는 거의 쓰이지 않는다.
연필은 인간 사고의 확장과 상상에 도움이 크지만 지워지지 않는 기록물을 작성할 때는 만년필과 볼펜이 필요해 이 필기구는 아직도 널리 사용되고 있다. 샤프펜슬(mechanical pencil) 등 필기구의 발전은 계속되고 있으나 시대 구분을 할 정도의 혁명적 변화는 키보드라고 본다. 이때가 우연히 X-세대의 출현과 겹친다.
눈을 키보드에 두고 '독수리 타법'으로 글자를 입력하는 사람과, 눈을 화면에 두고 열 손가락으로 키보드를 두드리는 사람의 생산력 차이는 엄청나다. 쓰고 지우고, 옮겨다 붙이는 등 Ctrl-z, Ctrl-c, Ctrl-v를 쓰고 필요하면 검색 기능으로 원하는 위치를 바로 찾을 수 있는 사람과, 원고지에 손글씨로 또박또박 쓰고 페이지를 넘겨가며 확인하는 사람과의 차이는 크다. 하지만 이때부터 입력 수단의 변화는 더욱 빨라진다. 새로운 입력 수단마다 다른 세대로 분류될 수 있다.
2G 폰으로 학창 시절을 보낸 소위 M세대는 '엄지족'이라는 말을 낳았다. 화면을 보지도 않고 주머니 속에서 원하는 메시지를 전송할 수 있고 그 속도도 빠르다. 그들의 필기구는 전화기 버튼이다. 키보드만큼 다양한 표현을 빠르게 할 수는 없지만 휴대성의 장점은 크다. 언제 어느 때고 필요하면 메모가 가능하다는 장점이 있다. 이때부터 줄임말의 필요성이 극대화됐다. 타이핑 시간의 단축과 데이터 사용을 줄이기 위하여 단어든 문장이든 줄여 쓰는 것이 미덕이다. '안구에 습기가' - '안습', '안물 안궁' 등등
M세대 다음 세대라 할 수 있는 Z세대는 초등학교 시절부터 아이폰을 시작으로 스마트폰을 만지며 살았다. 터치스크린이 필기구다. 버튼과는 달리 애플리케이션마다 그에 맞는 입력장치가 제공된다. 사진 확대, 위치 이동 등이 직관적이고 손가락 동작도 입력 수단이다. 이전의 고정식 입력 수단과는 큰 차이가 있다.
X세대 -키보드 / M세대 - 폰 버튼 / Z세대 - 터치스크린
이렇게 처음 사용하게 된 입력 장치로 세대를 구분하면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