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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천들판은 나지막한 구릉들이 주름치마처럼 드넓게 펼쳐져 있다. 어떤 곳은 촘촘히 겹쳐져 있고 또 어떤 곳은 성글게 벌어져 있다. 구릉들 사이 계곡을 이리저리 흘러 내려온 가늘고 작은 냇물들은 합해지기도 하고 갈라지기도 하면서 크고 작은 물줄기가 되어 탁록들판 이곳저곳을 어지럽게 파헤치면서 탁록천으로 흘러 들어가고 있었다.
오늘따라 판천 하늘에는 구름 한 점 없었고 공중을 날아다니는 새 한 마리도 볼 수 없었다. 적막을 깨는 날카로운 피리소리를 내면서 명적 한 발이 남쪽하늘을 향해 날아올랐다. 명적은 화살촉 대신에 구멍 뚫린 도자기나 깍지를 끼워서 날아갈 때 소리를 내게 하는 화살의 한 가지인데 활을 잘 쏘는 우리 배달족들이 전쟁터에서 신호의 수단으로 즐겨 사용하였다.
명적소리가 들리자마자 수많은 화살들이 명적이 날아간 방향을 따라서 쏘아 올려졌다. 전쟁이 시작되었다. 만반의 준비를 마친 치우의 부하들은 헌원의 군사들을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하늘을 덮을 듯한 새까만 화살들이 헌원의 머리 위에 사정없이 떨어졌다. 미처 준비가 덜 되었고 다소 무장이 허술한 병사들이 속수무책으로 힘없이 쓰러졌다.
산이 무너질 듯하고 땅이 꺼질 듯한 우렁찬 북소리를 울리며 헌원의 반격이 시작되었다. 헌원의 북소리는 마치 천둥을 닮아서 한번 들으면 머리가 깨져 귀에서 피가 났고 또 한 번 들으면 심장이 터져 코피를 흘렸다고 전해진다.
일반적으로 북은 말가죽이나 소가죽으로 만드는데 헌원의 신비한 북은 동해바다 깊은 곳에 사는 '기'라는 괴물의 가죽을 벗겨서 만들었다고 한다. '기'라는 동물의 생김새가 얼굴은 소같이 생겼으나 머리에 뿔은 없고 다리와 발굽은 하나뿐이라고 전해지고 있는 것으로 보아 악어의 일종이라고 보인다.
북채는 뇌택에 사는 뇌수의 가장 큰 뼈를 빼내어 북채로 사용했다고 하는 꾸며낸 이야기가 있는데 탄력이 좋은 박달나무가 자라지 않는 남쪽지방 사람들은 동물의 정강이 뼈를 북채로 사용한 것으로 알려져 왔다.
현원이 선봉에 내세울 비장의 무기는 역시 이리, 표범 등의 맹수들이다. 요란한 북소리를 뒤로 하고 굶주린 야수들은 치우의 진영을 바라보고 맹렬하게 뛰쳐나갔다. 그런데 어찌 된 영문인지 달려 나가던 맹수들은 벌벌 떨며 꼬리를 빼고 되돌아와서는 도리어 헌원의 진영을 난장판으로 만들고 말았다. 맹수들의 앞길을 가로막고 놀라 날뛰게 만든 존재는 무시무시한 도깨비 형상의 치우였다.
머리 위에는 두 개의 긴 뿔이 달려 있었고 여섯 개의 팔과 네 개의 다리를 갖고 있었다. 머리는 구리로 되어 있고 이마는 철로 되어 있었으며 온몸은 쇠로 된 갑옷으로 감싸고 있었다. 다섯 가지의 병기를 여섯 개의 팔로 자유자재로 휘둘렀고 네 개의 발로 종횡무진 널 뛰듯이 뛰었다. 순식간에 울부짖던 동물들의 비명소리는 잠잠해지고 들판에는 한줄기 시원한 바람이 불어와 뜨거웠던 전투의 열기를 식혀주고 있었다.
치우의 부하들을 무서운 쇠붙이로 무장한 철기병들이라고 파악한 헌원은 주력무기인 전차를 앞세워서 단숨에 격파해 버릴 계획을 세웠다. 전차들은 흙먼지를 날리며 기세등등하게 치우의 진영을 향해 돌진해 나갔다. 그러나 치우의 군사들은 강력하게 맞서 대항하지 않고 싸우는 척하다 도망치기를 반복하였다
언덕 위로 따라가면 구릉 아래로 도망치고, 구릉을 따라 쫓아가면 계곡 사이로 달아났다. 거친 너덜길과 험한 자갈밭을 정신없이 끌려다닌 마차들은 고장 나기 시작했다. 이음새가 헐거워져 바퀴가 빠지고 수레가 부서졌다. 말들도 지쳐 쓰러져 일어나지 못했다. 너무 깊은 곳까지 들어왔다고 느꼈을 때 이미 해는 지고 날은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갑자기 어둠속에서 울부짖는 소리가 들리더니 이매와 망량 같은 요괴들이 헌원의 군사들을 덮쳤다. 이 괴물들은 다름 아닌 치우의 형제들과 부하들이었다. 모두 다 뿔이 달린 투구를 쓰고 야수를 닮은 가면으로 얼굴을 감싸고 있었다. 너무나 공포스러운 모습이었다. 말로만 듣던 무서운 요괴와 귀신들이 실제로 눈앞에서 날뛰는 것으로 착각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놀란 현원의 병사들은 겁에 질려서 제대로 도망도 못 가고 치우의 병사들이 휘두르는 칼과 창, 도끼 등 다섯 가지 병기의 제물이 되고 말았다.
헌원은 진영을 백리나 후퇴시키고도 치우가 또다시 공격해 올까 봐 노심초사하였다. 헌원의 수하에 응룡이라는 장수가 있었다. 물을 관리하는 치수능력이 있었는데 수공으로 치우의 군사들을 물리칠 계획을 마련하였다. 하천의 상류 쪽 서너 곳에 물막이 공사를 하여 물을 잔뜩 모아 두었다가 치우의 군사들이 쳐들어 왔을 때 둑을 한꺼번에 터뜨려서 급류에 빠져 죽게 만들려는 계책이었다.
계책을 미리 알아차린 치우는 풍백과 우사에게 비와 바람을 몰고 오게 부탁하였다. 쉴 새 없이 쏟아부은 폭풍우에 임시로 막아놓은 제방은 견디지 못하고 무너져 내렸고 어마어마한 양의 물이 쏟아져서 도리어 헌원의 진영으로 흘러넘쳤다. 광풍과 폭우를 견디지 못한 헌원은 하늘을 향해 간절히 기도했다. 아직까지 하늘은 헌원을 버리지 않았는지 몸속에 불덩어리를 안고 있는 천녀인 발을 내려보내 비를 멎게 하였다.
발은 갖가지 신통력을 다 써 버려서 하늘로 돌아가지 못하고 이 땅에 남게 되었는데 이때부터 발이 머무르는 곳에는 비가 내리지 않았다는 전설이 있다. 한편 발은 헌원의 딸이라는 이야기도 있는데 여발이라고 불리었다. 여발은 태어날 때부터 지니고 있던 불기운을 이용하여 폭우를 멈추게 하고 아버지 헌원을 구출한 후 기력이 다 해 하늘나라로 가게 되었다. 옥황상제님께서는 여발의 효성에 탄복하여 가뭄을 다스리는 여신으로 삼으시고 한 발을 관장하게 하였다고 한다.
산전수전 모든 전투에서 한 번도 이기지 못한 헌원은 소금호수를 지키는 소금성으로 후퇴하여 전력을 재정비하고 훗날을 도모해 보기로 결정하였다. 물러서는 군사들의 배후가 공격당하지 않게 철저히 대비하고 질서 있게 빠져나가는데 산더미 만한 운무가 헌원의 대열을 막아섰다. 치우가 도술로 피워 올린 안개였다.
어쩌면 탁록들판은 안개가 자주 발생하는 지역일 수도 있겠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짙은 안갯속에서 헌원의 군사들은 우왕좌왕 제 갈길을 잃고 헤매었고 뒤따라 오던 군사들과 뒤섞여서 앞으로 나가지 못하고 제자리를 맴돌 뿐이었다.
헌원은 동쪽으로 혈로를 뚫어보려 하였지만 치우의 군사들에 막혔고 다시 서쪽으로 헤쳐나가 보려 하였지만 역부족으로 성공하지 못했다. 간신히 치우의 군사들을 피해 안갯속을 헤치고 어느 우물가에서 한숨을 돌리고 있는데, 한 무리의 군사들이 우물을 향해 달려왔다. 헌원은 추격해 온 치우의 군사들이라 짐작하고 우물에 뛰어들려 하였다. 적의 손에 생포되는 것보다 차라리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이 덜 치욕스럽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런데 주군을 찾는 목소리의 주인공은 헌원의 장수 풍후였다.
풍후는 언제나 남쪽을 가리키는 지남거를 타고 선두에 서서 헌원의 부대를 이끄는 장수이다. 지남거는 풍후가 북두칠성의 자루가 항상 변함없이 남쪽을 향하는 것을 관찰하고 만든 발명품이라고 하는데, 아마 서역에서 흘러 들어온 자석을 이용하여 만든 수레인 것 같다. 어쨌든 헌원은 풍후의 지남거 덕분에 방향을 잃지 않고 소금성으로 향할 수 있었다.
소금성에 도착한 헌원의 눈앞에는 또 한 번 깜짝 놀랄 광경이 펼쳐 있었다. 소금성 성루 꼭대기에는 소호를 상징하는 봉황새의 군기가 하늘 높이 펄럭이고 있었다. 치우와의 전투에 여념이 없는 틈을 타서 소호의 아들 구망이 소금호수와 소금성을 점령해 버린 것이었다.
망연자실한 헌원은 마지막 희망마저 물거품이 되자 눈물을 머금고 고향땅으로 퇴각하기로 결정하였다. 유웅국으로 돌아가는 평탄한 길은 이미 소호의 군사들이 점령하고 있었기 때문에 사막지대를 거쳐가는 험난한 길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사막에는 생명수가 비밀스럽게 숨어 있는데 어느 한 작은 물가에서 쉬고 있는 헌원의 눈에 멀리서 검은흙먼지를 일으키며 달려오는 한 무리의 군사가 들어왔다. 치우의 추격부대인 듯이 보였다. 가슴이 철렁한 헌원은 부랴부랴 짐을 싸서 다시 달아나기 시작했다.
추격부대는 예상대로 온갖 병기로 중무장한 치우의 철기병들이었다. 헌원부대의 꼬리가 잡힐 듯 말듯한 거리까지 좁혀졌을 때 갑자기 회오리바람이 불고 모래와 자갈들이 날아와서 치우의 군사들을 덮쳤다. 사막에서 자주 일어나는 현상인데 서왕모의 조화라는 이야기도 있다.
서왕모는 곤륜산에 살고 있는데 머리꾸미개를 꽂은 늙은 할멈의 얼굴에 호랑이 가죽을 덮어쓰고 얼룩덜룩한 표범의 꼬리를 달고 다니는 요괴라는 전설이 있는가 하면 지체 높은 여신으로 죽음과 생명을 담당하는 천신으로 사람들의 숭배를 받았다고 전해져 오기도 한다. 특히 목숨 걸고 사막을 오가며 생활하는 사람들은 서왕모에게 제물을 바쳐가며 별 탈 없이 무사하기를 빌었다고 한다.
서왕모의 음덕인지 우연의 일치인지는 알 수 없으나 회오리바람 덕분에 헌원은 구사일생으로 사막을 빠져나와 고향땅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되었으나 치우의 군사들은 거추장스러운 장비 때문에 돌과 모래의 무덤을 헤쳐 나오지 못하고 대부분 전사하고 말았다. 치우의 아우 비가 젊고 날랜 부하들을 이끌고 추격전을 벌였는데 불행하게도 아우 비도 살아 돌아오지 못했다. 비통한 소식을 전해 들은 치우는 더 이상의 추격을 멈추게 하였고 모든 병사들에게 국경을 넘지 말고 각자의 맡은 땅을 잘 지키고 보호하라고 당부했다.
10년간 계속된 치우와 헌원의 탁록전쟁은 신농국을 완전히 회복한 치우 군이 승리하고 73번의 크고 작은 전투에서 한 번도 이겨보지 못한 헌원의 패배로 끝이 났다.
그러나 후대에 이르러, 치우가 죽임을 당하여 사지가 여러 조각으로 잘리어 서로 다시 만나지 못하도록 먼 곳으로 분리하여 묻었다는 이야기도 만들어지고 헌원은 활도 버리고 투구가 벗겨지고 수염은 뽑히면서 도망 다니다 이름 없는 산골짜기에서 사망하였는데 신하들이 초라한 무덤을 마련해 묻어 주었다는 이야기도 생겨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