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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나의 이야기를 마쳐야 할 때가 된 것 같다. 나의 이름은 가루치이다. 나의 형님은 혁다세 천왕이고, 나의 아들은 거불단 천왕이다. 혁다세 천왕님이 슬하에 딸만 있고 아들이 없어서 나의 아들인 검나루가 뒤를 이어 천왕의 제위를 이어받았다. 그러니까 나는 제위에 오르지 못한 허울 좋은 왕족의 늙은이인 셈이다.
오늘은 나의 아들인 단웅의 혼례날이다. 단웅은 본명이고 검나루는 아명인데 지존이시고 이제 성인이 되셨으니 아명으로 막 부르지 않는 것이 아버지로서 최소한의 예의라 생각되어 앞으로는 본명을 주로 사용하려고 한다. 단웅은 어린 나이에 갑자기 높은 자리에 오르게 되어 막중한 임무를 수행하느라 바빠서 성가 할 시기를 놓쳤다. 후손을 생산하여 천왕가의 대를 끊기게 해서는 안 되겠다는 대의명분이 있었지만 죽기 전에 손자를 보고 싶다는 할아버지의 작은 소망도 마음 한편에 자리 잡고 있었다. 다른 일은 몰라도 아들의 결혼사업 정도는 아비가 마음껏 밀어붙여도 되는 일 아닌가.
단웅의 배필은 웅시국의 공주 소웅녀다. 웅시국은 대대로 여왕이 왕통을 계승해 오고 있는데 지금은 대모 웅녀가 통치하고 있다. 여왕님은 자오지 천왕님이 청구국으로 천도하신 후에 아사달로 옮겨 오셨는데 왕검의 자리에 올라 배달국과 웅시국을 모두 맡아 다스리고 있다.
아사달은 웅시국과 배달국의 접경지대에 자리 잡고 있는 신도시이다. 북쪽에는 백악산이 있고 남쪽에는 발하가 있는데 백악은 빛나는 산이고 발하는 맑은 물이다. 발하는 동쪽으로 흘러가서 배달국의 신시로 이어진다.
아사달은 아침의 땅, 새롭고 빛나는 땅이라는 의미가 있는데 이 땅의 자연적인 모습뿐만 아니라 미래에 대한 마음속 희망까지도 담겨있어서 매우 아름다운 지명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소웅녀는 매우 총명하고 지혜로운 여인으로 약초와 독초를 구별할 수 있는 신농에 비견되는 능력을 갖고 있었고 약초마다 지니고 있는 약효와 효능을 통달하고 있었다. 아프고 가난한 사람들을 찾아다니면서 치료해 주었고 특히 임신과 출산으로 고통받는 여인들에게 몸을 따뜻하게 하는 환약을 만들어 널리 배포하여 손쉽게 치유할 수 있게 배려하였다. 어린 나이에도 백성을 사랑하는 자비로움은 천왕의 배필로 부족함이 한 치도 없기에 기특하고 고마웠다.
단웅과 우리 일행은 사흘 전에 이곳 아사달에 들어왔는데 온 동네에 복사꽃과 살구꽃이 만발하였고 산벚꽃과 산동박꽃이 활짝 피어서 마치 무릉도원에 온 것 같았다. 오늘 아침에는 옅은 안개가 가볍게 내려앉았지만 아침 햇살에 깨끗이 사라지고 눈부시게 빛나는 날을 맞이하게 되어 하늘을 향해 감사드렸다.
화려하고 특색 있는 의관으로 치장한 여러 나라의 왕족들과 제후들이 진귀한 예물들을 받쳐 들고 궁궐 안 혼례식장으로 모여들기 시작하였다. 피리소리와 비파소리가 궁궐 너머 멀리까지 아름답게 울려 퍼졌다.
오늘 이 혼례는 나와 우리 가족의 개인적인 경사이기도 하지만 역사적으로도 큰 의미가 있는 일이다. 천손족의 초조이신 환웅천왕님께서 우리 선조들 삼천을 인도하여 이 땅에 터를 잡고 천시를 개설한 지 천여 년이 지났다. 우리 후손들은 하늘을 공경하고 인간을 사랑하는 숭고한 정신으로 새로운 땅에 뿌리내려 배달국, 숙신국. 웅시국, 신농국, 소호국, 구려국 등을 건설하며 동서남북 사방 수천리에 걸쳐 넓게 자리 잡고 살게 되는 성공을 거두었다.
이제 세월이 돌고 돌아 역대 최고의 업적을 이룬 천왕님의 왕비로 웅시국의 공주를 모시게 된 것은 환인님으로부터 천부받은 통치철학을 세상에 베풀어 얻어진 화합의 성과에 화려한 꽃을 한 번 더 피워 최고의 절정기를 이룩했다는 의미도 있지만, 신시개천의 초심을 다시 불러와서 국가 간의 결속을 강화하고 모든 나라가 한 뿌리에서 나온 공동체라는 인식을 심어주어 그 단단한 바탕 위에서 흔들림 없는 새로운 나라를 만들어 새 시대를 열어 가자는 미래지향적 의미도 있다.
역사는 계속해서 흐른다. 후손들은 끊임없이 우리의 자리를 메꾸어 갈 것이다. 우리의 자손들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지 않고 천년만년 승승장구 하기 위해선 무엇을 해야 하는지 생각해 보게 된다. 우선 우리가 자랑스러운 천손임을 잊지 말고 하늘 만을 숭배하여야 한다. 그리고 심신 수행에 힘써 하늘의 섭리를 이해하는데 부족함이 없어야 한다. 또한 예를 숭상하고 범절을 지켜 군자의 도를 잃지 않아야 한다.
정신적 중심만큼 물질적 풍요도 중시되어야 하는데 신농의 농업혁명과 치우의 금속 연마술 같은 신기술을 개발하는데 힘을 기울여야 한다. 나라를 지키는 국력은 넉넉한 재원과 풍성한 물자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또한 소국들 간에 교류를 활발하게 하여 부족한 물자들을 나누어 쓰고 골고루 잘 사는 나라를 이룩하여야 한다.
그 밖에도 할 말이 많지만 뒷방 노인네의 잔소리로 치부될까 봐 그만 줄여야겠다. 이제 밖에서 둥둥 둥둥 큰 북소리가 울리고 있다. 곧 혼례가 시작될 모양이다. 나도 식장으로 나가 왕족들과 하객들의 하례를 받아야겠다. 그리고 아들과 며느리의 폐백을 받고 밤과 대추를 신부의 치마폭에 잔뜩 뿌려 주어 손주들이 주렁주렁 태어나기를 기원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