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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털보네 가게에서 봤던 환영, 그 존재를 나는 보았다. 추욱 쳐진 채 힘도 의지도 앞날도 과거도 없는 그런 발걸음을 가진 존재. 그때 보았던 그녀였다. 그때 보았던 형체 그대로 길을 걷고 있었다. 환각이 아닌 실체였다. 팔월이었다. 폭염이 한창인 날이었고 여름의 초입답게 여름의 절정 속에 있었다. 여름을 이루는 조각들은 나를 모조리 분해하는 날씨였다. 실제 내가 분해되어 여름의 조각이 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들기도 했지만 그런 생각마저 모조리 부숴버릴 만큼 뜨거운 여름의 가운데였다. 생각의 길이가 유지될 수도 없는 그런 여름이라는 말이다. 그런 가운데에서 그녀를 본 것이다. 그리고 이번엔 마주했다. 그녀는 나를 똑바로 쳐다보지 못했다. 내 뒤에는 강렬하다 못해 때리는 햇빛이 내리쬐고 있었고 나는 햇빛을 등지고 있었다. 그녀가 나를 바라보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녀는 잠시 머뭇거렸다. 그녀도 알았던 것일까. 아니면 일렁이는 아스팔트의 열기에 놀란 것일까. 걷는 도중에는 알 수 없지만 멈추면 알 수 있는 것들이 존재한다. 자신의 존재와 비슷한 존재가 실존한다는 것을. 몇 초간의 머뭇거림은 그녀의 혼돈을 배출하는 듯했고 잠시 혼돈을 겪다 자신의 길을 다시 인지하고는 힘없이 그대로 나아왔다. 나는 그녀를 똑바로 응시하고 있었다. 며칠 전 털보네에서 보고자 했던 존재가 환영 인지 실제로 존재하는 것인지 알고 싶었다. 발걸음에는 많은 것들이 담겨있다. 그녀가 환영일지라도 그녀가 실존하는 것일지라도 그 존재에는 분명함이 존재했다. 실존을 느끼고 난 다음엔 느껴지지 않던 실체를 느낄 수 있었다. 한걸음엔 그녀의 과거. 다음 걸음에는 성년기의 고통. 그다음걸음엔 앞날에 닥칠 고난이 보였다. 그래서 나는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분명한 것은 환영이라고 생각하여도 너무나도 거대한 사실적 힘이 나의 앞으로 형체를 띈 채 다가오고 있었다. 물리학적인 오류는 없었다. 분명히. 나의 옆을 천천히 스쳐 지나가며 흘러간 향기마저 이것이 환영이 아님을 증명해 주는 듯했다. 진한 장미향. 장미향이 가득 담긴 섬유스프레이를 사용하는 것이 분명했다. 그녀가 지나가고 나는 그 향을 따라갔다. 자연스럽게 나는 그녀의 팔을 잡았다. 그녀도 잠시 움츠린 듯했지만 무언의 행동으로 깨달은 듯했다. 그렇게 우리는 자신의 나무만을 가꾸다 서로의 나무를 바라보았다. 두 나무 모두 그늘은 무성하지 않았다. 아직 무르익지 않은 성장이 끝나지 않은 나무일 테니. 군데군데 많은 상처들이 존재했고 그 상처들은 도끼나 큰 돌에 찍혔거나 매섭게 불타는 불꽃에 그슬렸거나 그리고 여러 가지 말이 적혀있었다. 나무는 자라고 있는 것이 신기하게 여겨지리만큼 아파 보였다. 그만큼 그늘 중간중간 사이사이 텅 빈 빛이 존재했다. 그것이 나를 굉장히 슬프게 했다. 그녀도 동일한 것을 느낀 것 같다. 그렇게 서로가 서로의 나무를 자세히 들여다보고 음미하며 확인한 뒤 우리는 서로의 우리가 되었다. 우리로서 서로의 우리 속으로 자연스럽게 스며들었다. 서로의 나무가 어떤 존재였는지 어떤 존재로 커나가는지 그리고 현재 어떤 존재인지 무형의 존재임에도 명확히 알 수 있었다. 그것만큼은 분명했다.
우리가 된 우리는 하루는 나의 집, 하루는 그녀의 집을 왕래하며 지냈다. 그녀의 집에서 같이 식사를 하려 준비를 할 때에나 우리 집에서 같이 창문을 열고 담배를 피울 때 하던 대화들은 왠지 모르게 자연스러운 풍경과는 다른 어색한 대화가 펼쳐졌다. 예를 들어 식사준비를 하는데 그녀는 나에게 밥을 먹었냐고 몇 번이나 물어보았다. 그리고 나는 항상 같은 담배를 태운다는 것을 알면서도 어떤 담배를 피우냐고 자주 물어보곤 했다. 그것은 서로가 서로에게 무관심하고 불편해서 발생한 것이라기 보단 자신의 영역에 새로운 존재가 스며들고 있음에서 발생하는 일종의 자가 염증반응 같은 것이었다. 외부에서 온 것인 줄 알았지만 사실 알고 보면 자기 자신이었던 것. 재채기가 나고 두드러기가 올라온다. 그것을 어떻게 할 수는 없다. 그저 지나가길 바랄 뿐. 우리는 그런 것을 또 적당히 알았기에 그런 바보 같은 질문이 수시로 이어져도 바보 같은 질문을 받는 상대방 역시 바보처럼 같은 대답을 정성스레 했다. 다른 사람에게 더 이상 자신의 나무가 상처받아 흉터로 남기 않기 위한 발악이었을 터. 그래서 더 정겨웠고 그래서 더 서로를 갈구했다. 그리고 서로를 더 탐식했고 서로를 집착했다. 스물네 시간으로 규정된 하루가 모자라게 느껴져 우리의 일상은 스물네 개의 시점을 지나 새로운 스물넷의 시작점에도 그 전과 그 이후가 모두 이어져 있었다. 하루의 끝과 시작이 없었다. 경계가 붕괴된 것이다. 시간이라는 것은 다른 사람의 규정이었을 뿐이다. 누군가의 규정인 시간이 지나면 머물고 있던 곳에서 다른 이의 집으로 옮겨가서 다른 일상처럼 보냈다. 그렇게 지내도 몇 날 며칠이 흘러 몇 주 몇 달이 되어서도 항상 같은 생활을 했다. 그렇게 서로의 나무를 존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