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각

by 지우

감각. 인체에 있는 신체 기관을 통해 외부 자극을 전기적 신호로 변환하여 뇌에 전달, 최종적 인지를 하는 것. 시각. 청각. 미각. 촉각. 후각. 감각을 한다는 것은 신체가 가진 기관의 기능이 박탈되지 않았다는 증거다. 눈에 문제가 생긴다면 시각에 문제가 생긴다. 코에 이상이 생긴다면 후각에 기능이 상실될 수 있다. 그와 반대로 눈에 이상이 없다면 시각적 감각은 문제가 없다. 코 역시 기능적 이상이 없다면 좋은 향 나쁜 향을 구분하는 데에는 문제가 없다. 우리 모두는 감각을 하는데에 기본적인 기능을 갖추고 있다. 감각은 굉장히 복잡한 것이다. 감각을 기관의 수용 그리고 전기적 신호로 뇌에 전달하는 과정이라고만 일반화하기엔 그렇게 단순하지는 않다. 즉, 누구나 동일한 감각을 하는 것은 아니다는 것. 감각이라는 단어를 일반화할 수는 있지만 그에 따른 결과를 일반화할 수는 없다. 1이라는 감각을 수용했다 해도 모두에게 1이라고만 입력되지 않는다. 모두의 뇌에서 1이라고만 입력되지 않는다. 그것이 인간이다.


인간을 일반화해 보자. 얼굴이 있고 얼굴에 눈 코 입 귀 그리고 전신을 둘러싼 피부. 그 모든 곳에서 감각을 수용한다. 감각수용체. 감각수용체는 쉴 수 없다. 외부로부터 오는 메시지를 해석하는 최전선에서 활동한다. 그리고 각 기관은 독립적으로 활동하는 듯 보이지만 감각을 인지하는 과정 그러니까 뇌가 최종적으로 판단하는 데 있어서는 두 개 이상의 기관이 같이 해당 감각을 판단하기 위한 근거를 뇌에게 제공한다. 예를 들자면 보기 좋은 음식을 먹고 맛있음을 판단할 때엔 시각, 후각, 미각이 필요하다. 때론 청각과 촉각도 역할을 해줄 수 있을 것이다. 그릇의 온도를 느끼는 촉각. 국물을 마시는 소리를 듣는 청각. 하나의 예시만을 들었는데 하나의 활동에 오감인 모든 감각 기능이 같은 사건을 처리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렇게 감각은 쉬운 일이 아니다. 감각은 가벼이 할 수 없다. 감각을 보편화할 수 없다.


세대 간의 불화. 세대 간의 불협화음은 어디서나 일어난다. 대한민국뿐만이 아닌 영국에서도 미국에서도 심지어 소크라테스가 살던 기원전에서도 세대 간의 불화는 존재했다. 출처를 찾을 수는 없었지만 기원전 4000년의 수메르문명의 토판에서도 그런 글이 있었다고 한다. '젊은이들은 예의가 없다.', '요즘 아이들은 버릇이 없다.'. 일맥상통하는 내용이다. 지금 역시 동일하지 않는가. 내가 속한 밀레니얼 세대는 Z세대를 보고 버릇없고 막무가내로 치부한다. X세대는 또 그 밑세대인 M세대를 나무란다. 끈기 없고 열정 없는 M세대. 역으로 봐볼까. Z세대는 M세대와 구별되기 원한다. MZ로 묶이는 것이 아니라 Z로서의 자존성을 강조한다. M세대 역시 X세대를 꼰대로 치부한다. X세대의 시대적인 것을 반영하지 못하고 왜 그렇게 사냐고들 한다.


세대 간의 조합은 물과 기름이다. 아무리 섞어도 유화되지 않는다. 그런데 과연 정말 세대가 잘못된 것일까. 기원전 4000년 전부터 시작된 세대 간의 갈등, 세대 간의 비난, 세대 간의 불화는 세상은 어쩌면 변한 것이 없다고 말하는 것 같다. 그냥 세상은 동일하다. 세대 간의 불화는 각 세대의 차이 혹은 세대의 잘못으로 인해 발생된 것이 아니고 그렇게 해야 할 대상이 필요했던 것이다. 비난할 대상. 분리되어야 할 대상. 눌러야 할 대상. 굳이 필요하지 않아 보여도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자신이 누구를 비난하는지. 자신이 어떤 것을 비난하는지 정말 아무도 알지 못할 것이다. 시간이 지나도 말이다. 그 근거는 베이비붐 세대의 전쟁참극을 누가 느낄 수 있을까. X세대의 민주화운동에 피를 흘린 것을 누가 제대로 기억이나 하고 있을까. M세대의 부동산좌절과 취업난을 누가 경험해 볼 수 있을까. Z세대의 지구의 위기 기후의 악화 그리고 반복되는 전쟁의 위협을 어느 세대가 어느 세대를 이해나 할 수 있을까.


단언컨대 없다. 절대로 사람은 다른 사람을 이해할 수 없다. 우리가 이해한다고 하는 것은 하나의 통념이다. 세계 2차 대전. 히틀러. 나치. 이해. 전두환. 광주민주화운동. 민주화. 이해. 국가부도. 취업난. 집구매불가. 이해. 지구온난화. 세계화시대의 전쟁. 이해. 그런 통념의 이해가 있을 뿐이다. 존중도 하지 못하고 있다. 우리는 서로의 서로세대를 존중하지 못하고 있기에 분열되었고 서로가 서로의 기둥이 되어주지 못하고 있기에 불편하기 그지없는 것이다. 감각하지 못하고 있다. 베이비붐. X. M. Z. 모두 감각을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모두 눈과 코와 귀와 입과 피부가 있음에도 말이다. 눈은 가리고 코는 막고 귓구멍을 틀어막고 입은 닫고 피부 위엔 두꺼운 갑옷을 입었다. 그러기에 누구와 만나도 자신의 이야기를 할 뿐이다. 나라고 다를까. 전혀. 나 역시 똑같다. 존중하는 척해 보이지만 존중하지 못한다. 이해하는 척만 할 뿐. 나 역시 부모를 이해하지 못한다. 나를 위해 방어막처럼 지은 아버지의 성은 나의 윗세대의 주책없게 치부했다. 엄마가 항상 하는 걱정은 사랑으로 바라보지 못하고 부정적 언어로만 결부시켰다. 아무리 무엇을 알고 있어도 실천의 영역을 다르고 느끼는 것 역시 다르다. 절대 오만하고 자만해서는 안된다. 사람은 넘어지기 너무나도 쉬운 안타까운 존재다.


그래서 감각이 중요하다. 눈을 떠야 한다. 코를 확장하고 비강 가득 공기를 마셔야 한다. 귀를 최대한 열고 들을 수 있는 것을 들어야 한다. 말을 해야 할 때는 말을 해야 한다. 그리고 피부는 드러내고 피부로 느껴야 한다. 모든 것을. 감각은 시작이다. 감각함으로써 끝나는 것이 아니라 뇌의 인지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모든 것이. 누군가를 위해서도 감각해야 한다. 누군가를 돕기 위해선 감각해야 한다. 느낄 수 있어야 한다. 로봇처럼 멀뚱이 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은 사람답게 행동해야 한다. 느끼는 것. 느끼지 못하면 Ai가 우리를 보조하는 것처럼 보일 시대가 오면 실제론 Ai에 먹힐 것이다. 사람은 정녕 전심으로 느끼면서 살아가야 한다고 굳게 믿는다.


감각은 서로가 다르다. 그래서 모두 고개를 들고 눈을 뜨고 코를 열고 귀를 기울이며 말해야 하고 피부로 모든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사실 나는 두렵다. 세상이 정말 절망의 숲으로 들어가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M세대다. 나는. Z세대의 전쟁의 두려움. 기후의 위기를 실제 느끼는 세대. 지구의 아픔을 느끼는 세대. 그것을 보고 나도 느낀다. 존중이 아닌 나도 느끼고 있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국경을 넘어설 때 들불처럼 번져 아내와 딸의 곁을 떠날 때가 오려나 두려웠다. 내가 살고 있는 지구는 분명 내가 어릴 때보다 뜨거워졌다. 춥지 않고 더울 때가 많다. 익히 보던 온난화의 시대를 넘어 이제는 끓어가는 지구로 변화함을 피부로 느낀다. 베이비붐 그리고 X세대. X세대는 모든 것을 자신의 자식에게 바쳤다. 그것이 결과가 어떻든 자신의 인생은 중요치 않은 채 자신의 자식에게만 모든 것을 투영했다. 그렇게 자신은 사라졌음에 그 모습을 부모를 바라봄으로써 느낀다.


감각. 감각은 위대하다. 그리고 감각은 날카롭다. 감각해야만 한다. 그래야만 한다. 눈은 보라고 있는 것이다. 귀는 들으라고 있는 것이다. 입은 말을 해야 하기 위해 존재한다. 코를 막고 악취를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무엇인지 알아내야 한다. 그리고 피부로 그 모든 것을 느껴야 한다. 감각하면서 살아가야 한다. 우리는 감각해야 우리가 우리로 될 수 있다. 어쩌면 감각함으로써 우리가 어려움에 처한 지금 이 시간 이 시대를 조금이라도 더 나은 세상을 만들 수 있지 않을까. 감각하자. 정말. 감각하자. 서로를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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