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을 보고 있으면 어떤 것에 의견을 가질 수 있는지 의심이 된다. 그리고 내 마음속에서 솟아난 나만의 의견이 필요한 것인가에 대해서도 고민한다. 굳이 입 밖으로 꺼내지 않는 경우가 다반사이다. 아직 내가 나의 의견을 믿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 의견이 옳으리란 보장이 없고 그 의견이 도움이 되리란 보장 역시 없다. 그럴 근거가 없다. 내 마음속에서 떠오른 하나의 아이디어일 뿐이지 어떤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생각을 저버린 지 좀 되었다. 세상엔 너무나도 많은 면이 존재해 내가 모든 면을 보지 않는 이상 속단하게 되고 결론짓기엔 내가 너무 역부족이란 생각을 한다. 의견은 가질 수 있지만 그것은 나의 것일 뿐. 이 부분에서 글로 모두 다 표현 못할 나와 세상 간의 그리고 나와 타자 간의 괴리가 발생한다. 말을 하지 않는 것에서 비롯되어 보이기도 한다. 관계형성에 있어서 어쩔 수 없이 의견의 상호교류가 필요한데 의견을 딱히 전하지 않는 것은 교류의 단절을 의미한다. 누가 무엇을 물어보아도 특별한 나의 사견이 들어가지 않으면 어떤 관계도 유지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런데 내가 나의 의견에 대한 의구심을 가지고 있어 말을 제대로 꺼내지 못한다는 것은 나와 세상, 타자 간에 간격에 큰 틈이 주어지는 것이다. 그 틈 사이에 다리를 짓지 못하고 배를 띄울 수도 없다.
지인 중에 나를 글의 세계로 이끌어준 젊은 독립출판사운영자이자 작가가 계신다. 그분과 이런 이야기를 했던가 어떤 것에 대해 이야기했던가 정확지 않지만 이런 얘기를 나눈 것은 기억난다. 사람이나 세상의 면엔 너무나도 개수가 많다고. 예를 들면 핸드폰을 들고 같이 쳐다본다. 핸드폰이라는 지정된 어떤 것을 같이 보는 것이라 생각하겠지만 당신은 핸드폰의 앞면을 보고 나는 핸드폰의 뒷면을 본다. 그래서 나는 사실 같을 것을 보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같은 것을 보아도 다른 면을 보는 것이다. 이 주제로 이것저것 의견을 나누었다. 동일한 결론이 났다. 모든 것에는 내가 보지 못하는 이면이 존재하고 그 면은 사실 하나가 아닌 수많은 다면의 성질로 이루어져 있다고.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삶을 살아가면서 보지 못하는 면이 많을 것이라고. 그 면을 볼 수 있는 눈을 갖기를 고대한다. 세상에 내가 보고 있는 면만이 진리라고 믿는 우매함을 가지기 싫다. 보지 못하는 면의 존재를 인지하고 평생을 살아가며 보지 못하는 면이 생길 수 있다는 것도 알아야 한다. 보기 싫은 면이 있어도 보아야 하고 보고 싶은 면만 보며 살아갈 수 없다는 것을 인식하고 싶다.
한파가 와도 서울역에서 잘 수밖에 없는 사람들. 로마에서 여행객들의 소지품을 도둑질해야만 하는 사람들. 마드리드에서 꽃 하나를 쥐어주며 돈을 달라고 협박하는 사람들. 그 어느 누구도 단면적이지 않을 것이다. 각자의 인생의 면은 겹치고 또 겹쳐져 두께와 높이를 이루고 보이지 않는 면은 자신의 앞뒤 양옆에 붙어 있는 면에 영향을 끼쳐 볼 수 없지만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사랑에도 이면이 참 많다. 사랑이라 함은 절대적인 것처럼 묘사된다. 사랑을 맹세함에 있어 장렬함이 느껴지는 것도 절대적인 것 '처럼' 보여서 그럴 것이다. 그러나 사랑에도 절대적인 이미지와는 다르게 이면 그리고 그 이상의 다면이 존재한다. 사랑이라고 사랑에서만 그치는 것이 아닌 질타와 증오, 분노와 폭력까지 이를 수 있다. 사랑의 이면은 그리고 단순하게 소수의 영역이 아닌 모든 사람이 띌 수 있음에 사랑이라는 것도 절대적이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다시 처음의 맥락으로 돌아가자면 내가 볼 수 없다는 것을 안 이상 쉽게 말을 꺼내지 못하게 되었다. 사랑이라는 가치는 내게도 절대적이었다. 그러나 뒤돌아선 사랑이나 사랑의 이면은 가시가 돋아있었다. 안을 수 없었고 잡을 수 없었다. 사랑이라는 가치 아래 희생이라는 것이 덕목처럼 여겨지지만 그것은 그냥 강요에 가까운 것이다. 강요는 따를 이유가 없는 것. 강요에 굳이 희생할 필요가 없다는 것. 분명하다. 사랑의 이면을 알고 나니 유독 더 사람과 얘기하기가 힘들어진다. 연인 혹은 자식 간의 관계에서 사랑뿐만 아니라 동료와 친구 간에 이어져있는 것도 사실 사랑이라고 생각한다. 시간이 쌓인 사랑일 수 있고 존중의 사랑일 수도 있다. 20년 가까이 봐온 사이이지만 이제는 나는 그들에게 말할 것이 없어졌다. 길러주고 품어준 부모에게 역시 내가 어떤 말도 하기 어렵다. 말을 하지 않는 것은 일종의 시위일 수 있다. 더 이상 나의 삶은 누구에게도 영향받지 않겠다는 시위. 말을 하지 않음으로써 내가 아닌 누군가에 대한 의견이 생기는 것도 제거하는 것이다. 그리고 내 성질 상 이야기 하지 못하면 병이 나기에 의견 자체의 생성을 막고 있다.
필요한 행위인지 확신은 없다. 그럼에도 계속 이렇게 살 것 같다. 누군가에 대한 존중일 수도 있고 나를 아끼는 방어일 수 있다. 여러면을 볼 수 있는 눈을 가지되 누군가에게 괜한 말을 하지 않는 연습일 수도 있다. 어쨌든 글을 쓰고 살아가고 싶으니 샘솟는 의견이나 불편은 이곳에 다 담아보자 싶다. 고립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전과는 다르게 꽤나 혼자 있다. 또 전과는 다르게 오히려 타인에 대한 의견이 생기지 않으니 불안하지 않다. 뭐 나름 고립의 장점이랄까.
삶을 생각한다. 삶은 한 가지의 규정된 형태가 아니다. 삶은 내가 보고 있는 면뿐만이 아닌 또 다른 면이 존재한다. 그리고 나뿐만이 아닌 다른 이들도 세상을 살아가고 세상을 바라본다. 수많은 면들이 겹쳐져 세상을 이룬다. 그 면은 모두 볼 수가 없다. 그래서 세상이 다채롭고 다양한 것이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