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많은 철학자들은 삶을 고통스럽다.라는 것 자체를 받아들여야 한다고 한다. 삶은 고통이다. 요 근래 많은 이들에게 읽힌 쇼펜하우어의 대명사와도 같은 문장이다. 우리가 생각하는, 현재 삶의 고통은 대부분 물질적이거나 현세 국한적인 고통을 말하곤 한다. 당연하게도 자신이 겪고 있는 지금, 바로 지금 당시의 문제가 가장 심화된 문제요 자신이 속한 세계의 불안정성을 실제 몸으로 겪고 있으니 어쩔 수 없다. 세계 2차 대전이나 100년간 이어졌던 잉글랜드와 프랑스전쟁, 14세기 유럽을 지옥의 대지로 만든 흑사병 등 우리가 겪지 못한 과거의 역사는 그저 기록에 불과하게 느껴진다. 고통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결국 실제 내가 느끼고 있는 나를 둘러싼 세계 혹은 개인의 문제에 대한 고통성을 인지할 수는 있지만 시대를 넘어선 더 좁게는 나를 둘러싸고 있지 않은 듯한 다른 곳 다른 시점의 일들에서 발생하는 고통은 쉽게 동일시하지 못한다. 그것이 인간이다.
그런데 쇼펜하우어는 굉장한 부잣집의 자제였다. 상인의 자녀로 당시에 겪을 수 있던 빈곤함이라는 것은 그에게 닿을 수 없는 아니 피부와 입과 코에 맞닿아있는 것이 아니었다. 지금도 그러하지만 빈부격차로 인해 실제 몸으로 닿는 고통을 겪는 고통의 크기는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체감할 수 없다. 나 역시 빈곤함을 몸으로 겪은 사람이 아니기에 이런 말을 입에 담는 것도 글을 써 내려가는 것도 누군가를 향한 기만일 수 있다. 말하고자 하는 바는 쇼펜하우어는 그럼에도 삶의 고통에 관해 철학적 해석을 풀었다는 것이다. 내가 실제 닿은 고통의 영역뿐 아니라 모든 것을 아우를 수 있는 그런 고통의 영역을 보는 것이 중요하지 않을까. 분명하게도 삶은 고통이다. 나 역시 그러하게 느낀다. 삶이 고통이지 않는 이상 미친 것과 같다고 생각한다. 삶이 고통이 아니라면 미치는 것 외에 다른 선택이 없어 보인다. 행복에 미치거나 돈에 미치거나 어떤 광적인 사념이 아니고선 삶은 분명하게도 고통이다.
그렇다면 고통 속에서 왜 살아가는가. 부터 시작해야 한다. 고통이 가득하고 고통으로 몸부림쳐야 한다면 왜 살아가는가. 혹 죽음이 두려워서? 나약한 용기에 죽음이라는 선택을 선뜻할 수 없어서? 아니면 가진 것이 많지 않지만 가진 것을 놓을 수 없어서? 사실 잘 모르겠다. 내가 생물학적 죽음을 맞이할 나이가 되어서도 고통이라는 세상을 스스로 등지지 않는가에 대한 정답 혹은 이유를 찾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내 시점의 고통은, 나만이 구성된 나의 세계의 고통은 누구도 겪을 수 없다. 그리고 누군가 겪고 있는 그만이 속한 세계의 고통은 역시 내가 겪을 수도 이해할 수도 경험할 수도 알아줄 수도 없다. 인생은 굉장히 고립적이다. 통증, 울음, 웃음, 비난, 폭력 등 모든 것들이 해당되는 생각과 행동은 다 고립적이다. 내가 겪는 모든 것을 말이나 행동으로 풀어내는 순간 개인이라는 가장 국소적인 묶음에 속한 고립에서 나오는 하나의 배출물일 뿐이다. 배출물을 보고 자신은 어떤 것이라 해석할 수 있겠지만 아무도 배출물을 다른 것으로 해석해 줄 수 없다. 지금 쓰고 있는 글 역시 배출물일 뿐이다. 그것을 이해하고 알아봐 달라는 것 자체가 미친 것이다.
누군가의 이해를 바람. 나를 품어달라. 나는 이렇게 고통스럽다. 나의 세계는 고통이다.부터 시작되는 모든 것이 진정한 고통이지 않나 싶다. 일종의 저주. 이해할 수 없고 품어줄 수 없고 고통을 알아줄 수 없는 자신만의 지극히 고립된 고통의 세계이다. 그리고 내 세계만이 고통으로 가득 찬 것이 아니라 매일 출근길에 마주치는 옆 빌라 할아버지도 팀장직을 박탕당하고 일반 사원으로 돌아간 나의 직장동료도 밤일을 하며 잠을 자야 할 때 제대로 못 자는 나의 배우자도 하루하루 모르는 것을 이해하고 하기 싫은 것 투성인 나의 딸아이의 세상도 고통으로 가득한 자신만의 고립된 세상인 것이다. 오히려 그것을 알고 나니 나의 고통이 이따금씩 경감됨을 느낀다. 과거 나는 나의 세상만이 고통이라는 인식이 분명하게 있었다. 내 삶이 가장 고통스럽다.라는 인식. 저주다. 내가 겪은 삶을 너는 알아?라고 말하려는 모습. 저주다. 고통은 고통일 뿐. 나의 세계는 나의 세계일 뿐. 배출되는 순간 무엇도 아니다. 아무것도 아니다.
저주에서 빠져나오는 데는 하나의 인식만이 필요했다. 물론 지금도 저주에서 온전히 빠져나와 나의 세계를 한 발짝 뒤에서 바라볼 수 있게 된 것은 분명하게 아니지만 삶은 고통이라는 것을 이제는 부정할 정도의 미친 것은 아니지만. 그 인식은 삶을 그래도 살아가게 만듦에 충분했다.
내가 나를 기투하는 것.
기투. 현재를 초월하여 미래에로 자기를 내던지는 실존의 존재 방식. 하이데거의 실존철학에서 다루는 단어라고 한다. 어디선가 들어본 말이 있다. 삶은 단어를 모으는 것이라고. 단어를 차곡차곡 모아 그것을 나의 세계로 해석하고 인지하고 풀어가고 적용하고 쓰러지고 무너지고 다시 세워가며 살아가는 것. 기투하는 것 외엔 정말 다른 답이 보이지 않는다. 내가 나의 고통을 정확히 인식해야 나는 실존에 가까워진다. 내가 나를 세계 속으로 던져낼 수 있어야 고통은 고통일 뿐이고 나는 나를 정확히 볼 수 있다. 나만의 이데올로기에 갇힌 채 누군가의 모습을 볼 수 없다면 나조차 볼 수 없다면 정말 죽음이 답일지도 모른다. 3mm만 뒤로 가보자. 조금만 뒤로 가서 바라보자. 나를 기투하고 나는 실존해 보자.
정말 무서운 것은. 삶이 정말 매섭게도 무서운 것은 이것을 한번 알았다고 끝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3mm의 물러섬은 계속해서 뒤로 나아가야 하는 것이다. 나의 세계는 계속해서 팽창한다. 팽창하는 만큼 더 빠른 속도로 뒤로 가야 나의 실존을 알아봐 줄 수 있다. 실존을 알아봐 주어야 고통을 경감할 수 있다.
너무나도 바쁘다. 그래도 잠시 살아나갈 이해를 발견한 것은 축복이다. 저주를 축복으로.
그래서 또 나는 나를 미래로 내던지고 살아가는 수밖에. 축복을 받고 고통이 덜 하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