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장수술과 보호자
"저 사실 수술받을 돈이 없는데 어쩌죠?"
"그럼 나가셔야 합니다"
즐거웠던 대학생활, 사실 큰 어려움이 있거나 하진 않았습니다. 아버지가 갑자기 교도소에 들어간다며 동생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건너 건너 연락이 왔을 때 정도? 학업, 진로 고민, 생계 걱정 등은 보통의 대학생들이 하는 고민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크게 아프지 않고 건강하게 생활할 수 있었던 것도 참 감사한 일이었습니다.
좋은 동기들, 친구들을 만나서 함께 시간 보내는 것도 좋았습니다. 아르바이트하면서 만난 친구들도, 기숙사 룸메이트들도 참 좋았습니다.
아악!!!!! OO아, 벌레 좀 잡아줘!!!
간혹 가다 기숙사에 벌레가 출몰하면 벌레를 잡는 일은 저의 몫이었습니다. 벌레 잡는 것에 익숙한 특기가 종종 빛을 발했습니다.
취미가 비슷한 룸메이트 언니와는 코인노래방을 다니기도 했습니다. 어느 날 학교 앞 코인노래방에서 ‘퍼펙트스코어’ 대회를 했는데 1등 상금이 7만 원이었습니다. 퍼펙트스코어가 뭔가 하고 보니 노래를 부르면 음정 박자 등을 점수화하는 게임 같은 시스템이었습니다. 그날부터 시간이 날 때마다 코인노래방에 가서 함께 연구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치열한 경쟁 끝에 1등을 거머쥐었습니다.
그런데 그간 코인노래방에 투자한 것을 생각해 보니 남는 장사는 아니었습니다. 그래도 기분이 좋아서 기념으로 치킨을 사서 룸메이트 언니들과 나눠먹었습니다.
또 하루는 갑자기 위경련이 와 경황이 없었을 때 같은 기숙사 살고 있던 친구 덕에 새벽에 응급실에 갈 수 있었던 고마운 기억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위 좋은 사람들과 평범한 대학생활을 보내면서도 한 가지 약간 부담이 되는 일이 있다면 인간관계를 맺는 것이었습니다. 사람들과 친해지며 저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이 꽤나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부모님은 뭐 하시니?“
“안 계세요.“
”어머! 미안해.“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어른들이 ‘부모님 뭐 하시니?’ 물을 때가 있었습니다. 저는 그냥 솔직하게 얘기하곤 했습니다. 뒤이은 어른들의 당혹스러운 표정을 보며 ‘괜히 말했나’ 싶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목사님 사모님 얘기를 해도 되나? 혈연가족을 의미하는 것 같은데’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구태여 제 상황을 설명할 필요도 없을뿐더러 연락은 안 하지만 법적으로 부모님이 계시긴 하니 이래저래 그냥 안 계신다고 하는 것이 편했습니다.
새로운 사람들을 만날 때도 “너는 동생이 몇 명이야?” 하는 질문을 많이 받았습니다. 당연히 혈연 동생을 의미하는 건 알고 있었지만 동생이 몇 명이라고 대답해야 할지 괜히 신경이 쓰이곤 했습니다.
남동생이 하나 있다고 하면 더 자세한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할까 조심스럽고, 그룹홈에 있는 동생들까지 동생이 7명이나 있다고 하면 남들이 저를 ‘동생이 7명이나 있는, 요즘 세상에 흔치 않은 케이스‘ 로 여길까 싶었습니다.
어느 날은 동생이 7명 있다고도 해봤습니다. 역시 예상대로 사람들은 아주 놀랐습니다. 뒤이어 사람들은 동생들과 제가 혈연관계임을 가정하고 얘기를 이어 나갔습니다. 혈연관계가 아니라고 굳이 부연 설명을 하면, 어딘가 사연 있는 사람으로 비칠까 싶었고 가만히 듣고 있자니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 같은 찜찜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되도록이면 제 이야기를 하길 꺼려했습니다.
친한 친구들에게 조차 속마음을 이야기하긴 어려웠습니다. 대화를 나누다 보면 가족얘기는 빠지지 않는 소재였습니다. 가족에 관해 얘기해야 하는 상황이 반복되면서 뭐 크게 개의치 않으려 했지만 마음 한편엔 뭔가 모를 찜찜함이 남아있었습니다.
대학교 3학년을 앞두고 방학 중 아르바이트를 하던 중이었습니다. 일을 하던 도중 이상하게 윗배가 아팠습니다. 뭔가 처음 느끼는 통증에 몸살 기운도 있는 것 같아 신경이 쓰였습니다. 애써 무시했는데 일 끝나고라도 이비인후과와 내과 둘 중 하나는 꼭 가야겠다 싶었습니다.
퇴근 후 이비인후과를 방문했습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이비인후과가 문을 닫았습니다. 근처 내과를 찾아갔습니다. 의사 선생님은 배를 꾹꾹 눌러보시더니 급하게 소견서를 써 주셨습니다.
”맹장? 당장 응급실에 가 보세요.“
응급실에 가서 검사를 받았는데 당장 내일 오전 수술을 해야 하니 입원하라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저는 돈이 없다고 했고, 병원에서는 그럼 나가야 한다고 했습니다. 병원으로서는 당연한 얘기라는 걸 알면서도 괜히 서러운 마음에 눈물이 왈칵 쏟아졌습니다.
그때 가장 먼저 생각난 사람이 목사님이었습니다. 전화를 걸자 일단 바로 수술을 하라고 하셨습니다. 바로 다음 날 아침 수술을 하게 되었는데 그땐 겁이 많아 마취하는 순간 ‘이대로 영영 눈을 감는 건가’ 싶어 눈물 한 방울을 또르르 흘렸습니다.
깨어나고 보니 민망할 정도로 간단했던 수술을 아주 잘 마쳤습니다. 맹장이 터지기 직전의 상황이었다는 설명을 들었습니다. 수술이 끝나고 나니 사모님과 목사님이 한달음에 달려오셨습니다. 오셔서 말씀해 주시기로 제가 긴급 의료비 지원 서비스를 받았다는 이야기를 해주셨습니다. 아이 참, 방법이 있는 줄 알았으면 병원에서 그렇게 서럽게 울진 않았을 텐데 말입니다.
“부모님은 뭐 하시니?”
“목사님 사모님이세요.”
”아 그러니?“
이후에는 누군가 제게 물으면 그냥 그룹홈 목사님 사모님을 부모님이라 말하곤 했습니다. 사실 뭐 부모님이나 다름없는 분들 아닌가 싶어서였습니다.
약간은 거짓말하는 것 같기도 했지만 이런저런 전후사정을 설명하기 번거로우니 그냥 그렇게 하기로 했습니다. 다수가 속해 있는 혈연 중심의 가족 형태에 속해 있지 않은 제 모습을 숨기고 싶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주로 사회에서 가족이라고 하면 혈연 중심의 가족 의미가 통용된다고 느꼈던 순간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비혈연 가족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는 일은 거의 없었습니다.
혈연은 아니더라도 항상 의지가 되는 사람들을 만나보니 가족이라는 건 반드시 혈연만으로 구성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렇지만 제 가정사를 얘기하는 것은 별로 내키지 않는 일이었습니다. 어디선가 가족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면 여전히 혼란스럽고 어딘가 정리되지 않은 듯한 기분이었습니다. 마치 막 엉켜있는 실타래를 굳이 풀지 않고 꽉 움켜쥐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맹장수술을 잘 마치고 회복하면서 공고를 보다가 우연히 정부지원 해외연수 프로그램을 발견했습니다. 미국! 자세히 읽어보니 중학생 때 단기연수로 다녀왔던 캘리포니아를 또 갈 수도 있는 기회였습니다. 그때부턴 온통 미국 연수에 꽂혀 머릿속이 온통 해외 연수 생각으로 뒤덮이기 시작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