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진 아버지, 나타난 어머니 1편
* 죽음 관련 소재로 글이 다소 무겁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ㅇㅇㅇ씨(아버지)가 사망하셨습니다. 따님이시죠? 직접 방문해 주시면 좋을 것 같은데요."
"동생은요?"
"동생은 OOO(장애인 임시보호시설)에 있어요."
침착하게 검은색 옷들을 챙기고 서둘러 짐을 싸서 기차에 올랐습니다. 아버지에 대한 애도는 잠시 미뤄두었습니다. 창밖의 풍경을 바라보며 당장 해야 할 것들에 집중하기로 했습니다.
늦은 밤, 경찰서에 도착했습니다. 아버지가 사시던 아파트에서 큰 소리가 나 이를 듣고 놀란 누군가가 신고를 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렇게 아버지의 사망 사실을 확인했습니다.
경찰관분은 아버지의 마지막 모습을 보여주는 것을 조심스러워하셨습니다. 17살에 가출하고 나서 처음 보는 아버지였습니다. 힘 없이 쓰러진 아버지의 모습이 너무나도 연약해 보였습니다.
"동생은 지금 어디에 있어요?"
동생이 있는 임시보호시설로 향했습니다. 오랜만에 본 동생은 전과는 다르게 포동포동 살이 올랐습니다. 동생은 늘 그렇듯 제가 누나인 줄 몰랐고, 너무 오랜만에 동생을 만나서인지 약간은 어색하기도 했습니다. 생글생글 웃는 동생 옆에서 애써 웃음을 지었습니다.
동생은 갈 곳이 없어 일단 입원을 하고, 중증장애인 시설에 단기간(1개월) 지낼 수 있다고 했습니다.
한 달간 동생이 시설에서 지내고 나면 그 이후에는 어디에서 살아야 하나 막막했습니다. 당시 중증장애인 수용 시설이 많지 않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하지만 이내 곧 다른 시설을 알아보고 보호자로 가서 동생이 시설에 입소하도록 해야겠다 싶었습니다.
동생을 보고 나니 시간이 너무 늦어 아버지와 동생이 살고 있던 집에 들어가 자기로 했습니다. 경비원 분과 잠깐 아버지의 비보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집에 들어갔습니다.
낯익은 뉴스 소리, 퀴퀴하고 쩌든 담배냄새, 정신없이 기어 다니는 바퀴벌레들… 십여 년 전 집을 나오기 전 그 순간으로 돌아온 듯했습니다. 방금 누군가 사다 놓은듯한 뜯지도 않은 바나나 한송이가 보였습니다.
텔레비전에서 들리는 뉴스 소리와 함께 금방이라도 누군가 집에 올 것만 같았습니다. 이 집이 이렇게 비어있을 집이 아닌데, 혼자 한참을 물끄러미 아파트 베란다에 앉아 창밖을 바라보았습니다.
아버지는 어린 시절의 동생과 저의 모습을 하나도 빼놓지 않고 간직하고 계셨습니다. 어린 시절 가지고 놀았던 장난감, 미술대회에 가서 그렸던 그림들, 동생과 함께 찍었던 사진들까지도 모두 그 시절 그대로였습니다.
항상 남는 게 사진이라고 하시면서 카메라를 들고 다니며 하루하루를 기록하셨었는데, 아버지는 떠나고 정말 사진들만 남았습니다.
늘 동생보다 딱 하루만 더 살고 싶다고 했으면서, 아버지가 더 이상 이 세상에 없다는 사실이 허망했습니다. 하지만 인명은 재천이라는 말도 있듯이 하루아침에 일어난, 누구도 예상 못한 일이었습니다.
가족이라 여기지 않고 살아온 지 꽤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어쩔 수 없는 관계이기에 시간적 여유가 있을 때 아버지가 돌아가신 것이 다행이라 생각했습니다. 언젠가는 마주할 일이라 마음의 준비를 해놓은 상태이기도 했습니다.
일단은 동생을 병원과 시설에 잘 보내는 것이 우선이라, 간단히 동생의 물품과 옷가지를 챙겼습니다. 집 안의 물건들을 정리하고 어린 시절 앨범을 보며 추억에 잠기기도 했습니다. 그 옆에는 아버지가 남긴 수백 페이지의 시집과 제게 남긴 편지들이 있었습니다.
아버지께서 정성스레 한 자 한 자 쓴 시와 제게 남긴 편지를 읽어내려갔습니다. 참 원망스러우면서도 ‘아버지도 지난날을 후회하는 평범한 인간이었구나’ 하는 씁쓸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집안 곳곳 붙어있던 아버지의 사진을 보니 세월이 많이 흘렀음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남겨진 메모들을 통해 ‘동생을 참 많이 아꼈구나’ 그러면서 ‘동생을 돌보는 것이 참 힘겨운 일이었구나’ 느꼈습니다. 이미 흘러간 시간을 되돌릴 수는 없었지만 이렇게 뒤늦게나마 아버지가 남긴 흔적들과 재회했습니다.
“아이고 딸내미야? 똑똑하고 이쁜 딸 하나 있다더니…”
다음 날 아침, 같은 아파트에 사시던 주민분들께서 아버지 이야기를 하고 계셨습니다. 검은 옷을 입고 캐리어를 끌고 가던 제가 딸인지 알아보시고는 저를 붙잡으셨습니다. 너무나도 안타까운 마음으로 위로해 주셨습니다.
“장애인 동생 키우느라 아버지가 얼마나 고생했겠냐” 하시면서 “사는 게 너무 고통이라 편하게 가셨을 수도 있다”는 이야기를 덧붙이셨습니다. 아버지가 좋은 분이었다는 이야기를 들으니 한편으로는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나저나 '이제 동생을 어떻게 해야 하나' 하는 생각이 우선이었습니다. 아버지의 사망 이후 절차, 동생의 시설을 알아보는 과정에서 아파트에 살고 계시던 통장님, 정신건강복지센터 선생님, 행정복지센터, 그리고 어릴 적부터 알고 지냈던 전도사님께서도 동생이 시설에 입소할 수 있도록 많은 도움을 주셨습니다.
동생을 시설에 보내려 짐을 챙기는데 행정복지센터에서 동생 보호자가 오신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보호자? 어머니가 오신다는 얘기인가?’
그러더니 어떤 아주머니가 나타나 반갑게 저를 불렀습니다.
“예림아! 잘 지냈어? 나 이모야 기억나?”
이모는 반가운 목소리로 말을 건네셨지만 제 이름은 예림이가 아니었습니다. 어머니가 몸이 좋지 않아 이모가 보호자인 어머니 대신 왔다고 했습니다. 행정복지센터에서는 어머니가 계시기 때문에 누나가 아닌 보호자에게 동생을 시설에 보낼 수 있는 모든 권한이 있다고 했습니다.
‘어머니는 동생을 키우지도 않았으면서’ 하는 생각도 잠시, 당시 돈도 없고 직장도 없어 동생을 책임질 형편이 안되었기 때문에 한편으로는 동생에게 보호자가 있다는 것을 다행으로 생각해야 할 것 같았습니다.
“예림아, 아버지 집은 있었어?”
어릴 적 외가에서 다들 제 이름을 예림이라고 불렀다는 이야기를 처음 전해 들었습니다. 낯선 이모라는 사람이 와서 내 이름도 아닌 이름을 부르며 친한 척을 하더니, 왜 집 관련한 사항을 묻는지 약간의 경계심이 들었습니다. 아버지가 빈털터리로 갔다는 게 그나마 다행이었습니다.
어머니 대신 오셨다고 하니 일단 막내 이모와 함께 동생을 시설에 잘 보내고, 어쩌다 보니 연락이 닿은 큰 이모가 밥을 사주신다고 해서 저녁을 함께 먹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제 앞에 누군가가 찾아왔는데, 다름 아닌 제가 4살 때 집을 나가셨다고 들었던 22년 만에 보는 어머니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