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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디 Aug 11. 2024

엄마가 없었는데요, 있었습니다

사라진 아버지, 나타난 어머니(2)


* 죽음 관련 소재로 글이 다소 무겁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 전편에 이어 계속됩니다.



그리고 제 앞에 누군가가 찾아왔는데, 다름 아닌 제가 4살 때 집을 나가셨다고 들었던 22년 만에 보는 어머니였습니다.



“내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어머니는 한동안 제대로 말을 잇지 못하셨습니다. 어머니로서는 어릴 때 보던 딸아이가 22년 후에 훌쩍 자란 모습을 보는 것이었습니다.



어머니는 어린 시절의 저를 기억하시겠지만, 저로서는 어린 시절의 기억이 남아있지 않아 어머니를 처음 뵙는 상황에 더 가까웠습니다. 어머니가 눈앞에 있다니, 낯설고 약간은 당혹스럽기까지 했습니다.



“어두울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밝네?”



이모부는 놀란 눈으로 저를 보며 말했습니다. 하는 일이 없어 조금은 부끄러웠지만, 어색한 상황을 꾹꾹 참고 밥을 먹었습니다. 어머니도 이모들도 참 가까운 곳에 살고 있었지만 존재조차 모르고 살아왔다는 게 신기했습니다.



어머니와 밥도 먹고 얘기도 나누었는데, 외모며 성격이며 닮은 구석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갑작스럽게 외가 친척들이 생기는 것도 꽤나 부담스러웠습니다. 22년의 간극을 메꾸려면 많은 시간이 필요해 보였습니다.



하지만 닮은 점도 발견했습니다. 어머니도 아버지의 폭력 때문에 힘든 시간을 보내셨었고, 집을 나오고 나서도 후유증에 시달리셨다는 안타까운 이야기를 전해 들었습니다. 자식들을 두고 떠나야만 했던 어머니의 마음도 많이 힘드셨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당시 자세하게는 묻지 않았지만 몸도 편찮으시고 일도 안 하고 계신 것을 보아 아무래도 저까지 신경 쓰시기에는 조금 힘드실지 모르겠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어머니는 보호자인 만큼 동생을 시설에 보낼지, 다른 대안이 있을지 고민하시는 듯했습니다. 어머니는 이모들도 어머니와 제가 함께 동생을 돌보라는 이야기를 했다고 하며 제 생각을 물으셨습니다.



어머니께서 보호자로서 뭔가 역할을 하고 싶은 마음이 있으셨겠거니 짐작했습니다. 하지만 이모들도 그렇고 아마 장애인 동생을 돌본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모르고 이야기를 한 것 아닌가 싶었습니다.



동생이 성인 남성을 밀면 휘청거릴 정도로 힘이 센데, 동생을 감당이나 할 수 있을지 싶은 게 솔직한 심정이었습니다. 본인들이 동생을 돌볼 것도 아니면서, 참 마음이 복잡해졌습니다.



결국엔 보호자인 어머니를 강경하게 설득해 동생을 시설에 보내기로 했습니다.






“기사님, 이런 상황에는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늦은 밤, 집에 오는 택시 안에서 택시 기사님도 무척이나 당혹스러워하셨지만, 진지하게 제 고민에 답해주셨습니다.



아버지가 쓰시던 핸드폰을 정지하고 재산조회 후 상속포기를 하는 등 어느 정도 절차가 마무리되면서 아버지를 완전히 떠나보냈습니다.



중증 장애인인 동생을 시설에 입소하는 문제 등 이런저런 일을 겪으며 혼란스러운 와중 시설 목사님 사모님, 친구들이 많은 위로를 해주었습니다. 사실 친구들을 몇 년간 보면서도 가족 관련 언급 자체를 피해왔습니다.



그동안은 누군가 ‘부모님은 무슨 일을 하시니?’ ‘너네 가족은 어때?’라는 질문을 들었을 때 대충 둘러대곤 했는데, 처음으로 친구들에게 속 시원하게 제 상황을 털어놓았습니다.



"너 아버지가 있었어? 어머니도 있었어?"
“네가 가족 얘기를 하니까 뭔가 어색하다.”
“내가 네 어머니보다 너를 더 많이 만났네.”



친구들의 반응은 제각각이었습니다. 친구들의 고민을 듣는 것에만 익숙했지 제 이야기를 하려니 영 어색했습니다.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나니 기분이 조금은 나아졌습니다.



언젠가 친구가 해준 말을 듣고 제가 나무인 줄 알았는데 외로운 순간에 주변을 둘러보니 든든한 나무들이 옆에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전도사님, 목사님 사모님, 친구들 등 주변에 이렇게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 많다는 생각이 들어 참 감사했습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난 후 삶의 무게가 아주 조금은 가벼워졌습니다.







어머니 드릴 말씀이 있어서요,
일단 동생 신경 써주셔서 정말 감사드려요.


처음에는 어머니를 몇십 년 만에 보는 것이 마냥 반가운 일일줄 알았는데 막상 얼굴을 뵙고 나니 복잡한 마음이 커지더라고요.


평생 친척들과 교류한 적도 명절도 챙겨본 적 없는데 갑자기 외가 친척들이 생기는 것도 부담스럽고 (중략)


혼자 지내온 시간이 길다 보니 아무래도 가족이 생긴 상황에 적응이 안 되어서 연락을 주고받기는 힘들 것 같아요.


좋은 분과 함께 잘 살고 계시다는 것을 알게 된 것만으로도 참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항상 건강하세요!


22년 만난 어머니와의 재회, 마냥 낭만적이지는 않았습니다.



누군가는 ‘아니 그래도 낳아주신 어머니 아닌가’ 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어머니와는 서로의 앞날을 응원하는 그 정도의 좋은 관계로 지내기로 했습니다.


때때로 시설에 찾아가 동생을 챙겨줄 수 있다는 것, 동생에게 보호자가 생겼다는 사실에 감사하며 살아가기로 했습니다.



가족 없던 제게 가족이 생긴다는 것, 마냥 좋아할 일인 줄 알았는데 꼭 그렇지만도 않았습니다.



언젠가 든든한 가족이 있었으면 했던 기대는 또 다른 부담이 되어 돌아왔습니다. 한동안은 혼란스러웠지만 법적인 가족들보다는 비혈연으로 구성된 사회적 관계가 더 의지가 되었습니다.






그렇게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이후 벌어진 상황들을 마주하면서, 이대로 가만히 있을 수는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일상의 변화가 간절한 시점이었습니다.



때마침 OO시에서 모집하고 있던 ‘자립준비청년 셰어하우스’에 입주한 것은 더 나은 방향으로 저를 이끌어주는 그 시작점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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