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우연히 쌀장사를 시작했다. 누군들 인생이 계획대로 굴러가게 하는 재주가 있겠냐마는 내가 쌀장사를 시작한 것도 나의 뜻과는 전혀 무관한 신의 애꿎은 장난에 의한 선택이었다고 생각해 왔다. 하지만 그 선택은 분명 내가 한 결정이었다.
일이 잘못되는 것은 전생에 죄가 많아서도 아니며, 하늘이 무심해서도 아니며, 팔자를 잘못 타고 나서도 아니다. 지금 내 인생은 과거의 내 선택들이 모인 것이다.
쌀장사를 시작하기 전 나의 직장은 부산 해운대구 반송동에 있는 신용협동조합이었다. 내가 잘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느닷없이 장사를 시작한 사연은 이렇다.
직장인이 되자마자 부리나케 가정을 꾸렸다.
결혼한 지 3년이 지나도록 아기가 생기지 않았다. 만으로는 2년이 조금 넘었을 뿐이지만 마음이 조급했다. 더구나 나는 형제자매가 없이 무녀독남으로 혼자 자란 외아들이 아닌가. 산부인과 진료도 받아보고 용하다는 한의원도 다녀보았다. 하지만 조급함은 또 다른 조급함을 불러올 뿐이었다. 고민 끝에 불임부부를 위한 치료로 유명한 산부인과를 찾았다. 병원 문을 열었을 때 첫 느낌은 ‘엇? 임신 못하는 부부가 이렇게 많아?’였다. 대기실은 항상 만원이었다.
천신만고 끝에 결혼 4년 차에 쌍둥이가 태어났다. 이란성쌍둥이였다. 남자아이 하나, 딸아이 하나.
쌍둥이 중 남자아이가 바로 아버지로 하여금 뜻밖의 쌀장사를 하도록 만든 둘도 없는 효자 아들이다. 효자 타이틀을 미리 붙여두는 것은 나중에 차차 설명하겠다.
아들은 1.95kg의 몸무게로 태어났다. 숨을 쉴 때마다 가슴뼈 전체가 배 쪽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폐가 덜 성숙하여 생기는 증상이라고 하였다.
태어난 지 7개월이 넘었다. 아들은 여느 아이랑 많이 달랐다. 뒤집기도 하지 않았다. 장난감에도 눈길을 주지 않다.
아들을 데리고 병원에 갔다.
- 뇌병변 장애가 있습니다.
의사의 말을 듣고 하늘이 노래졌다.
그렇다. 나의 아들은 지적장애를 수반한 뇌병변 장애를 가지고 태어났다.
아들이 나을 수만 있다면.. 그동안 조금씩 부어놓은 적금을 다 털어 넣었다. 내가 집안의 장손이라 할머니 장례식 뒤 맡아놓았던 부의금도 다 쏟아 부었다.
아들은 차도가 없었다. 아들은 영원히 2살 정도의 지적장애를 갖고 살아야 한다는 의사들의 예견이었다.
이대로는 안 된다. 당시 신용협동조합 초급 직원인 나의 월급으로는 아들의 진료비를 감당할 수 없었다. 앞으로 들어갈 진료비는? 게다가 우리나라 복지체계로는 아들의 장래를 보장할 수 없다.
아들이 평생 먹고 살 돈을 벌어야 놓아야 한다, 그러려면 월급쟁이로는 안 된다. 장사를 하면 월급보다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다는 말을 들은 적 있다. 그래, 그거다! 장사를 하자!
나는 이런 단순한 생각으로 아무 준비 없이 덜컥 쌀집을 개업했다. 2001년 1월 1일, 내 나이 서른셋이었다.
준비되지 않는 장사에 시련은 당연했다. 개업 후 쌀집이 자리 잡는 데는 무려 10여 년의 세월이 흘렀다. 긴 세월이 흐르는 동안 나의 청춘은 나락으로 떨어졌다.
그리고 다시 한 번 더 십여 년의 세월이 흘러 어느 듯 오십을 넘겨 쉰 중반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