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씩 그런 생각을 할 때가 있다.
짧았던 길었던 나와 인연이 되어 좀 더 친밀하게 많은 시간들을 함께 보냈던 학창 시절의 친구나 이성친구, 사회생활 속에서 특별히 서로에게 물심양면으로 힘이 되어주었던 사람들 중에 여러 가지 연유로 현재는 교류가 거의 없지만 그동안의 삶의 궤적은 어땠는지, 한 번 만나게 되면 어떤 감정이 다시 생겨나고 자연스럽게 만남을 다시 이어가게 될는지 같은 것들인데 현실에서 이루어지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옛말에 `흘러간 물로는 물레방아를 돌릴 수 없다.'는 것도 지나간 인연은 추억의 한 자락으로 남는 것이 자연스럽다는 시절인연과 맥락이 비슷한 표현일 것이다.
`시절인연'이란 표현이 지금처럼 대중적으로 회자된 것이 그리 오래된 것 같지는 않은데 내게 의미심장하게 이 표현이 가끔 머릿속을 맴도는 이유는 한 때 좋았던 인연은 한동안 별다른 교류 없이 살았어도 나에겐 어느 순간 연락을 해보거나 하려는 감성적인 성향이 있는데 결론적으로 상대방의 피드백은 나의 기대치에 못 미칠 때가 많아서 시절인연이란 말에 공감하며 위안을 삼을 때가 있기 때문이다.
내가 화양연화일 때 감성적이고 낭만적인 사고는 오롯이 대인관계에 긍정적 요소였던 것 같은데 점점 세상의 다채로운 풍파와 이해관계의 셈법으로 세공되어서 그런지 인생후반기의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선 그런 성향이 비현실적이고 부정적인 면으로 작용하여 낭패를 보게 되는 요인이 되기도 한다.
인간은 누구나 현재의 자기 모습이 유아기부터 첩첩이 쌓아 올려진 적토층과 비슷해 쉽게 변화할 수 있는 공간이 별로 없다.
어느 순간 예전에 볼 수 없었던 그의 모습은 개인무의식 속에 침잠되어 있었거나, 의식의 그림자로 억압되어 있던 것을 특정상황이 방아쇠역할을 하여 격발 시킨 사회적 가면 속에 숨은 그의 민낯일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한다.
인간의 심리란 끝이 없어 보이는 심해와 같아서 자신도 자기의 심리적 원형을 알기가 어렵고, 어떨 땐 격정적인 자신의 모습에 스스로 놀라고 실망스런때가 있는데 타인의 심리와 의도를 정확히 알기란 불가능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러다 보니 학창 시절이나 청춘시절의 시절인연에 연연해서 추억팔이하는 것은 분명 빛과 그림자가 공존하는 것 같다.
특정시기엔 서로가 특별한 존재였지만 현재 교류하지 않고 있는 대다수의 사람들은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의식의 흐름이 만들어낸 상황이자 인생의 격랑 속에서 생존을 위해 치열하게 살면서 변화된 우선순위가 가져온 결과물일 것이다.
그래도 시절인연으로 한 시절을 함께 풍미했던 사람 중에 소수의 사람은 그리울 때가 가끔 있다.
어떤 오해나 나의 불찰로 인해 관계의 조율과정 없이 단절되어 버린 것이 아닌가 하는 아쉬움이 들 때도 있지만 그런 걸 복원하기 위한 열정이나 용기가 이젠 샘솟지도 않고 스스로 절제하려고 노력하는 부분도 있는 것 같다.
내가 어렸을 때 주변 어른들이 흔히 하는 말이 인생 짧다는 말인데 언제부턴가 실감하는 나이대가 되어보니 자연의 풍광이 눈에 들어오고 그 속에 있을 때 행복감을 느끼며, 제대로 인생을 살아온 현재 교류하는 소수의 사람과의 정서적 교감이 삶의 큰 활력소가 되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