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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과 슬픔의 볼레로

by 김현석

어린 시절의 아련한 기억의 한 조각에는 경복궁에 관광온 서양인 노부부들의 다정한 모습과 여유로움이 편린으로 각인되어 있다.
청소년시기부터 그런 모습이 내겐 삶의 롤모델처럼 아름답고 좋아 보였던 것이 애늙은이 같은 정서가 함께 있었던 모양이다.

사회생활을 시작하면서는 회사에서 히어로 같은 직장상사가 가정에서 아내와는 냉랭한 전선을 구축하며 사는 모습에 결혼생활에 대한 혼돈에 빠진 기억도 함께 있다.

지금 생각하면 첫사랑시절은 고3 수험생인 데다 청소년기의 이성교제를 풍기문란으로 터부시 하던 암울한 시대였지만 그 4개월의 시간 동안 난 발이 땅에 닿지 않고 둥둥 떠다니며 세상과 유리된 기분으로 살았던 기억이 지금도 소환하면 선명하다.

그동안 무수히 많은 세월이 흐르고 여러 편의 영화를 만들 정도의 에피소드와 버라이어티 한 삶을 살았어도 참 신기한 일이다.
뇌과학에서 말하는 것처럼 인간에겐 처음 입력된 정보가 가장 우선시 되고 그걸 신뢰한다는 학설이 사랑의 영역에도 적용되는 것 일지도 모르겠다.

많은 사람들이 그러하듯 그 이후의 사랑도 좋은 추억들이 있지만 감정통제불능의 상태가 돼 본 기억은 별로 없다.
가장 큰 이유는 아마도 성인이 돼 갈수록 사람 그 자체도 중요하고 감정도 중요하지만 미래의 내 삶을 위해 상대방과의 케미나 경제적 안정성 등을 모색하기 때문일 것이다.

나이가 들수록 남의 사랑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을 거둬들이게 된다.
사회적으로 환영받지 못해도 파렴치한 수준이 아니면 손가락질하고 싶은 마음은 별로 없다.
어쩌면 돌고 돌아서 천생연분의 솔메이트를 만난 건지도 모르는데 잘 알지도 못하면서 남의 사랑을 폄하하는 사람들을 보면 왠지 못나 보이고 제대로 사랑 한 번 못 해본 사람들 같이 보인다.

예전에 전 독일총리가 자서전을 갖고 우리나라를 찾아왔을 때 독일언론에서 그 총리가 25살 연하의 한국여성과 열애 중이란 기사가 대서특필되었는데 그 총리의 이력이 화려해서 사랑에는 나이도 국경도 아무 상관이 없구나 하는 것을 새삼 느끼면서도 이런 생각은 한 것 같다, 이 남자는 서양여성과 네 번의 결혼과 이혼 이후에 비로소 동양여성으로 마지막 사랑을 찾은 것일까?

사랑의 본질에는 두 개의 커다란 방향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하나는 예전에 아시아의 슈바이처로 불리던 이종석박사와 일본인 아내 같은 숭고하고 지조 있는 단선적인 사랑.
(일본인 아내는 생전에 남편이 남편으로서 아버지로서 나에겐 히어로였다니 두 말해서 무엇하리...)

또 다른 하나는 프랑스영화 <사랑과 슬픔의 볼레로>, <퐁네프의 연인들>이나 <잉글리시 페이션트>같이 몽환적이면서 그로데스크 하고 치명적이면서도 숭고한 입체적인 사랑이 아닐까?

많은 사람들이 별생각 없이 이상형의 연인을 물어보면 대부분 별생각 없이 잘생기거나 예쁘면서 능력도 있는 이성을 말하지만 세상을 조금 살아보니 사려 깊고 마음이 따뜻한 사람이 이상형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런 건 삶을 살아내 봐야 알 수 있는 사랑의 비밀 같은 것 같다.
그래서 인생은 살아 볼 만한 가치가 있을지도 모른다. 살아봐야 진정으로 알 수 있는 것들이 너무도 많기 때문이다.

진정한 사랑은 그 사람이 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사실 만으로 가슴이 설레고 내 삶의 의미가 되어주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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