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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창 Apr 17. 2016

두려움을 이기고

바다 수영

어떤 이유에서 비롯되었건 누구나 한 가지씩은 막연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습니다. 비상구나 소화전에 켜져 있는 빨간 등을 무서워하는 사람도 있고, 창문턱이나 함석지붕 위에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를 무서워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전문적인 용어로 고소공포증이나 폐쇄공포증과 같은 두려움을 가진 사람들은 잠실 5단지 아파트들처럼 훤하게 뚫린, 고층아파트의 긴 복도를 걸어가는 일이 쉽지 않고, 작은 엘리베이터를 혼자 타는 일도 쉽지는 않습니다. 누구에게는 간단하고 아무렇지도 않은 일이지만 다른 누구에게는 어렵고 고통스러울 수 있죠. 하지만, 인생이란 것이 크고 작은 두려움들을 이겨가는 과정의 연속이라고도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저는 어둠 속에 있는 것을 무척 두려워합니다. 나름 신실한 가톨릭 신자라고 자부하지만 심지어 성당도 불 꺼지면 어려워합니다. 높이 올라가는 것과 빨리 움직이는 것들을 너무나도 싫어해서 롤러코스터를 사랑하지 않습니다. 여러 가지 귀신 이야기들은 저로 하여금 한때는 샤워할 때 아무리 눈이 따가워도 절대로 눈감지 않도록 만들었고, 자정이 넘어서는 화장실 문턱을 넘거나 거울을 쳐다보지 않도록 했습니다. 직장에서 야근을 밥먹듯이 해야 했기에 문제가 많았죠. 한창 출장을 다닐 때에는 집보다 호텔방에서 자는 경우가 훨씬 많았는데, 이것도 보통 고통스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어떤 호텔은 옆방의 화장실 물 내리는 소리가 천둥처럼 들리고, 나이트 커튼이 없어서 거리의 불빛들이 얇은 커튼 위로 가로수 가지와 잎들을 마구 흔들어 놓고, 침대 바로 위 천장 한가운데에 화재경보기 빨간등이 켜져 있기도 합니다. 제가 다 무서워하는 것들입니다.


제 아이들은 저와 같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아이들이 어릴 때부터 저는 무지하게 씩씩한 척했었죠. 절대로 제 것일 것 같지 않았던 운전면허증도 큰아이가 여덟 살 때 취득했고, 아이들이 타자고 조르기도 전에 부추겨서 웬만한 놀이동산의 롤러코스터들은 다 탔죠. 심지어 번지점프와 패러글라이딩도 했습니다. 번지는 줄을 다 묶고서도 너무 무서워서 물러나려 했더니 인스트럭터가, 절벽 위 전망대에서 소리치며 열광하는 제 아이들을 가리키며 말하더군요. “쟤네들 네 아이들이지? 너 지금 여기서 포기하고 나가면 평~생 아이들에게 창피한 모습으로 기억된다.” 그 바람에 할 수 없이 십자 성호를 긋고 뛰어내렸죠. 집 앞에 있는 야외수영장에는 5m 하드보드 다이빙대가 있는데, 아들이 겁 없이 막 뛰어내리는 것을 보고는 아빠도 질 수 없다는 생각으로 뛰었다가 엉덩이가 터질 것 같은 고통을 맛보기도 했습니다.


아빠의 노력 때문이었는지 아들은 커가면서 만나는 두려움들을 하나씩 이겨가는 듯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아들에게도 쉽지 않은 것이 하나 있었으니 바로 바다수영이었습니다. 수영장에서는 한 번 들어가면 두세 시간을 쉬지 않고 훈련하는 녀석이 바다만큼은 힘들어했던 이유가 헤엄치는 물속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저도 이건 아직까지 절대로 이겨내지 못한 공포입니다. Shek-O beach에서 부표로 만들어 놓은 인공섬까지 한 번 헤엄친 이후로 다시는 시도하지 않고 있죠. 얼굴을 내밀고 평형으로만 수영하는데 허벅지와 종아리에 조금이라도 온도 차이가 나는 물결을 느끼게 되면 금방이라도 쥐가 날듯한, 혹은 상어라도 나타나 다리를 물어버릴 것 같은 공포에 휩싸이게 됩니다.


© 오주현

아들은 친구들과 함께 홍콩수영연맹이 주관하는 바다수영대회(Open Water Swim)에 출전하게 되었습니다. New Territory의 Tai Mei Tuk Water Sports Centre에서 해마다 한 번씩 펼쳐지는 수영대회는 바다를 가로막은 방파제 옆을 따라 조성된 2km 길이의 코스에서 벌어집니다. 그리고 이 바다는 수면 바로 아래부터 검푸르기까지 한 초록빛으로 뒤덮여 아무것도 보이지가 않습니다. 그 안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무엇이 헤엄치고 있는지 짐작하기도 어려운 바다에서 300mm 줌렌즈로도 그 끝이 잘 잡히지 않는 직사각형의 코스를 헤엄쳐야 합니다.

© 오주현

어린 남녀 선수들이 나이별로 그룹을 지어 30분 정도의 간격을 두고 출발합니다. 그룹별로 흰색, 주홍색, 초록색, 파란색 등의 수영모를 쓰고 팔뚝 위의 출전 번호를 자랑스레 휘둘러 보이며, 아이들은 바다로 뛰어듭니다. 수면 위를 날갯짓하듯이 헤엄치는 물고기떼 마냥, 바다 위로 날아오를 것 같은 힘찬 스트로크로 물살을 헤쳐 나갑니다. 간간이 시합을 마치고 못하고 배에 실려 돌아오는 안타까운 모습들이 보이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아이들은 50분 안에 돌아옵니다.

© 오주현
© 오주현
© 오주현

지치지도 않는 아이들의 물짓이 일으키는 물보라에 가려 들어오는 선수들의 얼굴이나 번호가 보이지 않는 중에도 아들의 모습을 찾는 카메라 뒤에서 아빠는 간절한 혼잣말을 중얼거립니다. ‘그래, 그렇게 이겨내는 거야. 앞서고 뒤서는 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애태우며 기다리는 아빠의 마음은 어느새 아들을 향한 기도가 됩니다. 마침내 물 위로 물개같이 미끈함 몸매를 드러내며 일어서는 아들을 찾았을 땐 한없이 자랑스럽고 대견하기만 합니다. ‘잘했다, 아들아!’

© 오주현

인생의 어느 순간에 어떤 어려움과 두려움이 우리를 막아 설지 모르지만 우리는 언제나 차분하게 이겨나갈 것입니다. 곧 커다란 태풍이 지나갈 것으로 예보되어 있는 홍콩에는 비가 내리고 바람이 불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태풍이 지나간 뒤에 더 찬란히 빛날 햇살을 먼저 상상합니다.


2013년 8월 1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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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brunch.co.kr/@69010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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