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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창 Apr 14. 2016

La Musica Dolce

친구의 독창회

무대는 숨고르기를 시작했는데, 객석에서는 아직 기침소리가 들린다. 프로그램을 넘기는지 바스락 거린다. 완전히 숨죽이지 않았지만 루트(Lute) 반주자에게 사인을 주었다. 친구를 위해 화살기도를 보낸다. 바로크(Baroque) 성악곡답게 전주 없이 반주자와 연주자가 거의 동시에 소리를 내기 시작한다. 아, 다행이다. 소리가 부드럽다. 지난 몇 주 동안 감기와 황사로 고생한다고 해서 걱정했는데, 그래서 친구들이 기도 많이 하겠다고 했는데……


살바토레 로사(Salvatore Rosa)의 짧은 곡,  “곁에 있음은”(Star vicino)이 챔버홀 천정을 타고 객석으로 흘러든다. 감실 앞에 켜 놓은 작은 촛불의 빛이 성당 안을 감싸듯이 가느다란 줄기로 높이 올라간 소리가 객석을 감싸 안는다. 울림통이 없는 루트의 가녀린 19줄을 떠난 음표들은 연주자가 노래하는 “가장 큰 기쁨의 사랑과 가장 큰 슬픔의 사랑”을 어깨에 얹고 공중에서 춤을 춘다. 맑고 가벼운 동시에 느리고 우아한 춤이다. 아시시의 안개 젖은 수도원의 새벽을 여는 그레고리안 찬트를 연상케 한다. 두 소절쯤 지나자 연주자의 표정이 안정된다. 처음에 살짝 보이던 얼굴의 긴장은 첫 만남이 어색한 어린아이가 엄마의 치맛자락 뒤로 숨듯이 이내 사라졌다. 그러고는 아이는 다시 귀여운 얼굴을 살며시 내민다. 늘 그렇듯이 펜을 들었다. 첫 메모는 이렇게 시작한다. “Nice and smooth opening!”  그래, 참 부드럽게 시작했구나. 루트의 소리가 살짝 작은 듯하지만 여섯째 줄에 앉아 듣고 있는 내가 불평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오히려 집중도를 높여준다. 쉽사리 접하지 못하는 바로크 음악으로 천천히 빨려 들어가기 시작한다. 손바닥 땀구멍들이 살짝 젖어들기 시작한다. 첫 곡이 평화롭게 마지막 호흡을 내려놓자, 나도 긴장을 푼다.


쳄발로 반주자가 관객들에게 생소한 악기 루트와 다음 연주곡들에 대하여 간단히 설명한다. 나도 그제야 프로그램을 찬찬히 다시 살펴본다. 전날 하룻밤 길로 춘천을 다녀오느라 겨우 옷만 갈아 입고 뛰어 와서는 공연장에 오신 초등학교 때 선생님을 마중하고 한 반이었던 친구들과 인사하고 오랜 친구인 연주자의 부모님께 인사드리고…… 그렇게 정신없이 들어와 객석에 앉았더니 내 손에 프로그램도 하나 없었다. 이럴 때 “ㅋㅋ”다. 사실 지난 몇 주 동안 마음을 어지럽게 했던 일들로 인해 미리 연주곡들을 찾아 듣고 친구들을 위해 간단한 설명을 써보려 했던 계획을 실천하지 못한 아쉬움이 다시 밀려온다…… 1부는 모두 바로크구나.


두 번째 화살기도와 함께 시작한 존 다우랜드(John Dowland)의 “다시 한 번 내게로”(Come again)는 가사가 쏙쏙 들어온다. 루트의 현을 아르페지오의 손가락들이 “띠리링” 한 번 울리자 이 작은 곡이 연주자의 입술 끝을 기다렸다는 듯이 떠나온다.  그런데 “다시 돌아오라”는 노랫가사가 살랑거리는 봄바람이 불어오는 언덕으로 우리를 데려간다.  겨우내 얼었던 대지 속에서 숨죽이고 있다가 올라 온 연초록의 새순들 위로 어린 연인들이 맨발로 뛰어다닌다. 이미 돌아왔노라고 메아리를 보낸다. 밝고 맑다! 그렇구나. 초등학교에서 제일 처음 배우는 다장조의 곡이다. 밝을 수밖에 없다. 연주 시간이 3분도 채 되지 않을 듯한 이 곡은 이분의 사 박자로 나가다가 중간에 이분의 이 박자로 바뀐다.  “To see, to hear, to touch, to kiss, to die, with thee again in sweetest sympathy.”  네 박자로 언덕으로 올라와서는 한 숨 가다듬고 (한 박자 쉬고) 두 박자로 바꾸어 춤을 추며 서로를 마주 본다. 또 한 숨을 멈추면 서로의 소리를 듣고, 서로를 어루만진다. 노랑나비도 날아와 이 꽃 저 꽃 위를 같은 박자로 뛰어다닐 듯하지 않은가. 사랑은 부드럽다가 격렬하기도 하고 어느 순간에 잠시의 회환이 몰려 올 수도 있다. 그래서 이 곡은 이분의 육박자까지도 넘나들며 마디마다 변박을 주기도 한다. 사랑은 늘 같은 박자일 수가 없지 않은가? 오늘 연주곡들 중에서 가장 오래전에 작곡된 곡일 것 같은데, 영화 “Begin again”에서 그레타(키이라 나이틀리, Keira Knightley)가 불렀어도 잘 어울렸을 듯하다. 바로크가 아니라 16세기에 불려진 “발라드”(Ballad)다. 사랑을 간구하는 저 노래는 혹시 그때엔 금지곡이지 않았을까? 반복되는 패턴 위에 얹어 놓은 저 가사에서 “to die”의 역할은 절묘하기 짝이 없다. 사랑하는 연인이 보고 듣고 어루만지고 입맞춤한 다음에는 무엇을 하지? 그 사랑의 절정을 보통 “죽는다”고들 한다. (^^)  또, 그렇게 열렬히 사랑한 연인이라면 백년해로 끝에 “죽어서” 새로운 여행을 떠나면 그 또한 얼마나 대단한 사랑인가. 이 곡은 별표 세 개를 주어도 아깝지 않다. 난 어쩌면 이 곡을 무척 사랑하게 될 것 같다.


아쉽게도 다우랜드의 다른 곡, “흘러라 눈물이여”(Flow my tears)는 내 가슴속을 깊이 파고들지 못한다. 연주자의 노래 때문이 아니다. 영어로 쓰인 바로크 곡들을 많이 듣지 못한, 부족한 내 음악적 소양과 이태리어와 독어라면 아무 생각 없이 가슴으로 들었을 노래들이 영어로만 불리면 내 귀로 들어야겠다는 얄팍한 자존심이 어우러져서 빚어낸 결과일 뿐이다. 객석의 어두운 조명 아래에서는 프로그램에 수록된 번역을 쉽게 읽을 수 없는 탓도 있으리라. 어쩌면 루트의 키를 바꾸는 과정에서 반주자가 너무 세심한 손길로 카포(capodasto)를 얹는 모습을 보면서 약간의 짜증이 났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루트 리사이틀이었어도 저보다는 빨리 끼우지 않을까? 왜 어깨끈을 풀었다가 다시 매는 거지?’ 참, 별게 다 신경 쓰이는 나다. 그보다는 다장조의 악보 위를 가슴 벅차게 달려가던 사랑이 갑자기 단조로 분위기를 바꾸고 한숨과 신음 속에 눈물을 흘리기 때문은 아닐까? 하지만 나의 이런저런 생각들에는 아랑곳없이, 전주 한 마디 없이 동시에 소리 내기 시작한 연주자와 반주자는 꽤 긴 곡이 끝나도록 매우 훌륭한 하모니를 보여준다. 루트는 여전히 가녀린 소리로 가련하고 비통한 사랑을 더 애절하게 만든다. 소프라노의 목소리는 이제 제대로 풀린 듯하다. 긴 노래 끝에 마지막 호흡도 모자람 없이 간결하다.


이제 반주자는 다음 곡 해설과 함께 바로크 첼로와 바로크 바이올린에 대한 설명도 곁들인다. 루트와 마찬가지로 이들도 양이나 염소의 창자로 만든 거트현(Gut-core strings)을 쓴단다. 그런데 헨델(Händel)이 영국으로 여행을 한 줄 알았더니 귀화를 했었단다. 그래서 그의 작품 대부분이 영어로 쓰였단다. 언제 한 번 음악공부를 제대로 해보나 싶다. 박종호의 오페라 책이나 여행기만 볼 것이 아니라 나도 음악에 “꽂혀” 보자. 하여튼 오늘 듣게 되는 헨델의 두 곡은 많지 않은 헨델의 독일어 작품이란다. 가사를 들으려 애쓸 일이 없으니 편하겠구나. 그런데 엔드 핀(end pin)이 없어서 다리 사이에 끼워 놓은 저 바로크 첼로가 영 신경 쓰인다. 반주자의 다리가 신경 쓰이나? (^^)


슬쩍 본 가사들이 눈에 쏙 들어와서 안경을 코끝에 걸고 다시 본다.

    “감미로운 침묵, 걱정 없는 정적의 잔잔한 샘.

    영혼 그 스스로가 기뻐한다.

    이 모든 산업화된 허무한 시간 후에,

    나는 눈앞에서 그 쉼을 부르네.

    바로 그 쉼은 영원히 우리를 기다린다.”


(‘기뻐하네’, ‘기다리네’로 운율을 맞추어 번역했으면 좋았을 것을……)


    “빛과 그림자가 어우러져 있는 곳,

    고요히 밝은 눈동자와 마음에서

    그 자신들이 회복됨을 찾습니다.

    그러면 나의 만족스러운 영혼이

    내 가슴속에서 솟아납니다.

    그리고 창조주의 자비함을 찬양합니다.”


연주자는 늘 자신이 믿는 주님께 감사하는 사람이다. 그녀는 밑도 끝도 없이 늘 감사하단다. 그녀가 이렇게 관객들 앞에서 연주하는 이유는 주님의 사랑을 나누고 전하기 위해서다. 감기로 고생하고 황사 때문에 목이 상해서 힘들어할 때도 그녀는 걱정하기보다는 감사하며 고통을 받아들였다. 지나가야 하는 일이라는 것을 알기에, 손으로 발로 뛰고 몸으로 겪어내야만 하는 것을 알기에 그녀는 누구에게도 불평하지 않고 누구에게도 대신 맡기지 않고 스스로 견디어 내었다. 그녀가 도움을 구하는 것은 언제나 하나뿐이다. 가까운 친구들에게 기도만을 부탁한다. 그런 그녀를 알기에 부탁받지 않아도 기도하는 친구들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기도의 힘을 알기에 그녀는 다른 것은 쳐다보지 않아도 기도만 붙든다. 굵은 동아줄인지 썩은 동아줄인지 상관하지 않는다. 안 끊어진다도 굳게 믿기 때문이다. 가끔 그런 그녀가 바보 같다. 하지만, 돌아가신 추기경께서도 바보처럼 살라고 하셨으니……


연주자가 신앙의 눈으로 고른 곡들이 쳄발로와 바로크 첼로, 바로크 바이올린의 소리와 어울려 간절한 기도로 살아난다. 어린아이들이 불고 노는 비눗방울처럼 방울방울 기도 방울이 되어 음악당 안에 퍼져 올라간다. 거트현이 내는 소리는 합성이나 금속코어 현과는 다르다. 당연히 지극히 아날로그다. 조금 가는 소리를 내는 듯하지만 금속성의 날카로운 소리 대신에 따뜻하고 부드럽다. 쳄발로가 “쳉쳉” 거리는 것 같아도 피아노의 높은 옥타브가 내는 “똑똑” 소리와는 차원이 다른 깊이가 뒤따라 나온다. 세 악기 중에서는 바로크 첼로의 개성을 찾기가 가장 어렵다. 엔드 핀이 없어서 다리 사이에 끼고 연주를 하기 때문에 첼로에 비해서 보를 통해 현에 전달되는 힘이 훨씬 약한 듯하다. 무대 위 그림이 좋아졌다. 루트와 단둘이 무대에 올랐을 때엔 추운 듯 느껴지던 연분홍의 드레스가 세 악기의 도움을 얻어서 이제 따뜻해졌다. 루트의 가녀린 소리만큼이나 조심스럽게 울려대던 소프라노의 성대가 이제는 땀에 젖은 소리를 낸다. 더 달려도 된다고 신호를 보내고 있다. 그러나, 바로크 음악이 아니던가. 인간의 목소리가 하나의 악기로서 다른 반주 악기들과 어우러져 화음을 내는 바로크의 살롱 뮤직의 진수를 보여주고 있다. 헨델의 음악이라고는 메시아와 천지창조만 듣던 알량한 나의 귀가 이백 년 역사를 풍미했던  바로크 음악의 정점을 찍는 헨델의 성가곡에서 한없이 무너져 내리고 있다. 무대가 따뜻해지고 나니 이제 소리에 더 집중할 수 있게 되었다. 무대 위의 세 악기가 눈을 감으면 바로크 오르간 한 대의 소리를 듣는 듯하다. 오르간은 오묘한 악기다. 어떤 악기의 소리도 오르간 속에 다 있다. 요즘처럼 갖가지 악기의 음색으로 조절할 수 있는 전자오르간이 아니더라도, 파이프 오르간이 늘어놓은 다양한 길이의 원통 안에는 어디 숨었는지조차 알 수 없는 악기들이 다 들어있다. 그 속에서 쳄발로와 바로크 첼로와 바로크 바이올린의 소리를 찾기란 구중 구곡에서 산삼을 찾는 일이 아니다. 그저 허리를 펴고 반듯이 앉아 귀를 쫑긋 세우고 두 손을 모아 가슴에 얹으면 그곳에 오르간이 들어앉아 저 세 악기들을 자유로이 연주해 낸다. 천상의 소리가 난다. 기도하는 성가곡이니 당연한 것이라 하기엔 훌륭한 연주를 깎아내리는 것 같다. 기도는 헨델의 두 번째 곡으로 이어진다. 화려하지는 않으면서 마음 깊이 우러나는 기도를 올리는 간절한 마음이 저절로 드러나는 듯한 곡이다. 허무를 지나고 찾은 (사실은 주님께서 손잡아 이끌어 데려다 주신) 쉼터에서 주님의 자비로우심을 찬양한다. 저런 기도는 언제라도 듣고 받아주시지 않을까? 다만, 바로크 바이올린이 쳄발로 쪽으로 한 발 물러서 있었으면 전체의 소리가 보다 안정된 느낌이 들었을 것 같아 아쉬웠다. 바로크 첼로와는 달리 연주자와 같은 선상에 너무 바싹 붙어 있어서 소리의 원근감을 해치는 동시에 연주자의 목소리를 약간 잡아먹었다.

(번역된 가사를 보느라 제대로 듣지 못했던 해설을 집에 돌아와서 자료를 찾는 가운데 이해하게 되었다. 이 두 곡은 헨델의 작품번호 HWV 202번에서 210번에 해당하는 “Nine German Arias” 시리즈의 성가곡들 중 205번과 209번이다.)


이제 바로크의 마지막 순서다. 이탈리아의 시칠리아 출신인 알레산드로 스카를라티 (Alessandro Scarlatti)는 오페라를 115곡이나 작곡했다고 알려진, 나폴리악파의 아버지라고 불리어지지만 우리에게는 낯선 작곡가이다. (그의 공식 이름은 Pietro Alessandro Gaspare Scarlatti란다.) 연주자가 선택한 두 곡도 각각 “Griselda”와 “Scipinone nelle Spagne”이라는 오페라의 아리아들이다. (보카치오의 데카메론에서 연유된 이야기를 바탕으로 한 오페라 Griselda는 Antonio Vivaldi와 Giovanni Bononcini가 작곡한 동일한 제목과 내용의 오페라도 있으니 주의.) 반주자의 해설에 의하면 스카를라티는 기악곡의 형식들을 성악곡에 접목하여 난이도가 매우 높은 곡들을 작곡하여 성악가들을 괴롭혔다고 한다. 허, 이거 엄청 기대되는데!  (나중에 찾아보니 유튜브에도 동영상이 몇 개 없다. 그나마 조회수도 매우 작다. 어렵고 인기 없는 곡들임에 틀림없다. – 우리의 연주자는 확실히 고집이 있다!)  아니나 다를까, 서 너 소절쯤 지나자마자 바이올린의 보가 두세 개의 현을 고무줄놀이하듯이 옮겨 다녀야 할 것 같은 “아아아~~~ 아아아~~~ 아아”가 반복된다. 한두 소절 지나면 또 “아아아~~~ 아아아~~~” 한다. “나의 쓰라린 슬픔” (Nell’aspro mio dolor)이라는 제목은 “나의 쓰러질듯한 슬픔”으로 바꾸는 것이 어울릴 듯하다. 약간 가슴 졸이며 듣게 되는 곡인데 (난 사실 이런 순간을 그리 즐기지는 못한다. 특히 연주자가 내 친구일 경우에는 말이다) 연주는 무사히 잘 마무리되었다. 연주자는 이제 더할 나위 없이 풍부해지고 부드러워진 소리 위에 마음껏 기교를 부리며 장식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저렇게 기교를 부리며 노래하다가 결국 바로크가 무너지고 고전주의로 넘어가는 계기가 되었을까?’


1710년 바르셀로나를 배경으로 하는 두 번째 곡, “솟아라, 사랑이여”(Ergiti, Amor)는 소프라노의 목에 상당한 부담감을 준다. 맥주를 잘 들이키는 사람들은 맥주를 마시지 않고 목구멍을 열어 놓은 상태에서 들이붓는 경우를 가끔 본다. 성대를 열어 두고 호흡만 들락날락하지 않고서야 저 높은음들을 데리고 저렇게 종달새 지저귀듯 노래하기 쉽지 않을 듯하다. 대개는 내가 잘 아는 곡을 연주할 때에 어디서 실수를 하는지 알게 되기 때문에 나도 긴장을 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 곡은 다르다. 저렇게 써 놓은 곡은 어떻게 불러도 한두 곳에서는 실수하게 마련일 거라는 생각이 절로 든다. 현학적인 성향을 가진 연주자들이 내지르는 창법으로 부르면 무척 잘 부른다는 느낌을 가지게 하기 십상일 듯하다. 하지만 오늘의 연주자는 푸른 하늘을 높이 날며 까불어대는 종다리가 아니라 봄날 물오른 나뭇가지 끝에 살짝 걸터앉은 종다리 같은 소리를 통하여 이 기교 가득 찬 바로크를 바로크답게 풀어내고 있다. (유튜브에서 똥땅 거리는 피아노와 함께 녹음된 연주들을 들어보면 우리의 연주자가 얼마나 품위 있게 이 바로크 곡을 연주했는지 금방 알게 된다.) 1부를 거의 마쳤다는 생각이 일찍 밀려들었기 때문일까, 내 귀에 마지막 몇 마디의 피치가 안정감 있게 내려앉지 않는다. 하기야 이 곡의 어느 음표도 애초부터 그런 안정감과는 거리가 멀다.


그렇게 1부가 끝났다. 박수가 절로 나온다. 많은 관객들이 (공연 전 주의사항에도 불구하고) 연속된 두 곡들의 중간에 박수를 쳐도 살짝 따라 하기만 하면서 참고 있었던 내 손바닥들이 오케스트라의 심벌즈가 부럽지 않을 소리를 내며 마주치고 있었다. 어깨가 아플 만큼 박수를 치고 나서야 나도 객석의 의자 등받이에 기대어 본다. 잘했다! 저렇게 1부를 마쳤으니 2부는 걱정할 것도 없다고 생각하는 순간에, 옆 자리의 친구가 한 마디 건네 온다. 연주자의 목소리를 들으니 지난번 연주 때 같지 않은 것이 확실히 컨디션이 안 좋은 것 같단다. 컨디션이 최선은 아닌 것이 맞지만, 컨디션이 나빠서가 아니라 바로크라서 그리 연주한 것이니 2부를 기다려보라고 답했다. 내가 들어왔던 연주자의 목소리 중에서 오늘이 사실 제일 좋다. 아마도 목 상태가 최선이었다면 저토록 훌륭한 바로크를 오늘 우리는 듣지 못했을 지도 모른다. 그녀가 덜 조심하고 더 크게 불렀다면 바로크답지 못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2부는 편안히 즐기면 된다. 걱정할 노래가 없다. 연주가 끝나고 뒤풀이 장소에서 그녀를 만나면 해 줄 이야기가 생겼다. “바로크 음반 하나 녹음해라!” 그녀는 아리아들도 잘하지만 바로크가 참으로 잘 어울리는 lyric soprano라는 것을 오늘 처음 알았다.


잠시 선생님 옆자리에 다녀왔다. 35년 전 생애 첫 교직에서 맡아 키운 제자의 독창회에 동료 선생님들과 함께 오신 우리 선생님의 고운 얼굴에 기쁨이 가득하시다. 노래 잘하는 제자에, 잊지 않고 찾아와서 인사드리는 옆 반의 이름도 모르는 제자들에, 여러 가지로 동료분들의 부러움을 사고 계시던 터였다. 우리의 연주자가 이렇게 잘하는지 몰랐다는 말씀과 함께 “Flow my tears”를 들으시며 눈물이 날 듯했다고 하신다. 공연에 온다고 했던 친구들 가운데 휴식시간이 끝날 때까지 한 친구의 얼굴이 안 보인다. 꺼두었던 전화기에 손이 가지만 다시 내려놓았다. 아직 도착하지 못했으면 그녀의 마음이 더 급할 터이니……


빈센조 벨리니(Vincenzo Bellini)의 “간절한 소망” (Il fervido desiderio)으로 2부를 시작한다. 도입부에서부터 감미롭기 그지없는 이 곡은 너무 달지도 너무 쓰지도 않은 품위 있는 비엔나커피를 마시는 느낌이랄까, 아니면 적당한 온도에서 아이스크림과 섞인 에스프레소의 아포가토를 먹는 느낌이랄까…… 방금 지나온 바로크의 시대를 고전주의의 클래식(Classic)으로 이어주려고 만들어 놓은 작은 나무다리 혹은 징검돌다리 같다. 나의 만년필이 이 곡 밑에 딱 두 단어만 쓰고 뚜껑을 닫았다. “참 좋다!” 오늘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사랑타령인데, 이 사랑들이 어쩌면 이렇게 다들 다른 모양을 하고 있을까? 사람들의 생김이 제각인 양, 이 노래들도 독특한 개성 속에 심어진 작곡가의 의도를 서로 경쟁이라도 하듯 드러내 보이고 있다. 그런데 이 서로 다른 사랑의 노래들이 우리 연주자의 입술 끝에서 어느 노래들은 더 아름답고 다른 노래들은 아픈 사랑 때문에 힘들어한다. 후자의 곡들에서는 샾과 플랫 사이를 오가는 음표들이 스스로 아픈 가슴을 부여잡고 몸을 떤다. 오늘 프로그램 중 가사의 내용이 지나간 혹은 떠나간 사랑을 아파하는 곡들이 모두 후자에 속한다. 그런 의미에서 벨리니의 두 번째 곡, “회상” (La Ricordanza)도 예외가 아니며, 그래서인지 앞서의 감동을 약간 반감시킨다. 그러나 크게 문제 되지 않는다. 다음 곡이 얼마나 기다려지는가?


내가 최고로 꼽는 남성 이중창 아리아, “Au fond du Temple Saint”가 나오는 오페라 “진주조개잡이” (Les pecheur de perles)에서 레일라(Leila)가 부르는 아리아가 아닌가! 그런데 피아노 반주자가 곡을 미리 설명하려 입장하는데 독일 병정 같은 씩씩한 걸음걸이로 객석에 웃음을 선사한다. 키가 크고 체격이 반듯한 반주자는 얼굴이 작아서 훨씬 더 커 보이는데, 그녀가 팔을 앞뒤로 흔들어 가면서 씩씩하게 무대를 가로질러 걷는 모습은 아마도 일부러 설정한 듯이 우스꽝스러운 연출이다. 하지만 관객들과 호흡한다는 측면에서 훗날에도 빙그레 웃으며 기억할만한 장면을 선사하고 있다. 거기다가 “진주조개잡이”를 한 번에 제대로 발음하지 못해서 또 웃겼다. 더 웃긴 건, 그렇게 씩씩한 걸음과 해설 끝에 마치 로봇이 우주선 조종석에 앉듯이 피아노 스툴에 앉은 그녀는 벨리니 때와 마찬가지로 섬세하고 부드럽기 짝이 없는 반주를 한다. 놀라운 그녀다. (물론 그녀는 뒤풀이 장소에서 스타가 되었다.) 운명의 레일라가 부르는 아리아는 가사를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멜로디만으로도 애절하다. 여러 오페라를 남긴 조르주 비제(Georges Bizet)는 베르디와 바그너와 함께 낭만주의를 대표하는 작곡가인데, 그를 유명하게 만든 최초의 오페라가 진주조개잡이이며 그가 유명해진 후 죽기 삼 개월 전에 작곡한 오페라가 바로 더 유명한 “카르멘” (Carmen)이다. 소프라노의 연주가 훌륭했던 것은 지난번 그룹 연주회 때에 같은 곡을 불렀었기 때문일까? 자신감 배어나오는 소리로 화려한 고음마저 떡 주무르듯이 소화해 내는 연주를 들으며 나는 한 가지 생각만 했다. ‘노래가 끝나면 “브라보”라고 외칠까, “브ㄹㄹㄹㄹㄹ아~~~보”라고 외칠까?’ 궁금하신 분들은 연주 동영상을 꼭 보셔야 한다. 노래가 끝나고 박수 소리가 크다. 제자들이 저 뒤에 앉았있나 보다. 객석 뒤에서 울리는 박수와 함성이 요란하다. 그러나 어찌 앞 줄 여섯 번째에서 질러대는 나의 함성만 할까? (ㅋㅋ) 이번에도 딱 두 단어만 썼네. “자~알 했어!!!” 여기까지만으로도 오늘 프로그램이 얼마나 잘 짜인 것인지 느낄 수 있다. ‘그렇구나, 오늘의 이 프로그램은 “주님께서 미리 마련해주신” 것이구나.’ 앞서 느낀 연주자의 목소리에 대한 생각을 확인시켜 주기에 충분했다. 1부와 2부의 곡들이 서로를 멋지게 보완해주며 서로를 더 멋지게 완성해주고 있다. 인간이 하는 일이 아니다. 인간의 욕심은 필시 일을 그르쳤을 가능성이 높다. 주님은 오묘하시고 위대하시다.


반주자는 다음 곡 해설에도 같은 모습으로 (물론 마지막 곡 해설까지 계속 쭈욱) 관객들에게 강인한 인상을 심어주었다. 그런데 연주자가 무대로 나오지를 않는다. 무대 뒤에서 기침이라도 하는 것일까? 멈추지 않는 기침 때문에 급히 더운물이라도 찾고 있는 것은 아닐까? 친구들의 머리 속 화살기도는 살짝 열린 무대 출입구를 향하여 날아간다. 다행이다. 이내 연주자가 모습을 드러낸다. 박수 소리가 아까보다 높다. 이 곡도 얼마 전에 한 번 연주했던 곡이다. 더글라스 무어(Douglas Moore)의 “버드나무의 노래” (Willow Song)다. 연주자는 이 곡에 감정이입이 잘 되는 것 같다. 주님께서 그녀의 삶에 환희와 영광을 주시기 전에 고통과 인내도 허락하셨기 때문이다. 예고 없이 순간 튀어 오르는 고음도 잘 소화했고 감정을 나무랄 데 없이 여기저기에 흐드러 놓았다 – 한창 무르익은 봄날의 버드나무 가지들처럼…… 이 곡에 와서야 연주자의 붉은색 2부 연주복이 빛을 발한다. 그전까지는 약간 어색했는데…… (ㅋㅋ, 미안)  호텔의 피아노에 앉아 노래하는 오페라의 여주인공 베이비 도우(Baby Doe) 같지 않은가?


어느덧 무대는 막바지를 향해 치닫고 있다. 대개의 독주회가 일가 친인척과 학교 선후배 그리고 제자들끼리의 잔치가 되기 일쑤인데, 사실 오늘 독창회는 예당의 IBK챔버홀이 꽉 찼다. 만석이다! 그 관객들이 1부의 바로크를 다 이해하고 2부의 오페라들의 제목이라도 한 번씩 들어봤으리라고 기대하는 것보다 전 인류가 천국 가기를 기대하는 것이 더 쉬울 것이다. 그런데 그 객석이 바로크를 숨죽이고 듣더니 이제는 아리아를 따라 들썩이고 있다. 음악에 이끌려 몰입하고 있다. 연주자의 흡입력이 갈수록 위력을 발휘하면서 객석과 무대의 거리가 사라지고 있다. 방금 연주된 두 곡의 오페라 아리아가 선사한 고음들은 음악의 문외한들조차도 아무 생각 없이 손뼉 치게 만드는 마력을 지니고 있다. 연주자는 이제 활활 타오르기 시작한 객석의 불꽃 위로 기름을 부으려 한다. 정열의 스페인 오페라로!  그러니까 이태리어, 영어, 불어에 이어 스페인어로 마무리한다. 연주자가 저거 다 외우려고 머리에 쥐 좀 났을 것이 틀림없다. (ㅋㅋ)


작곡가의 본명이 이렇게 긴 것은 처음이다. 미구엘 마퀴스(Miguel Marqués)의 본명은 믿거나 말거나 Pedro Miguel Juan Buenaventura Bernadino Marqués y García란다. 갑자기 뮤지컬 “메리 포핀스” (Mary Poppins)에 나오는 단어 “Supercalifragilisticexpialidocious”가 생각난다. (ㅋㅋ).  당연히 내겐 낯선 이름의 작곡가다. 다른 한 작곡가, 프란씨스코 아센조 바르비에리(Francisco Asenjo Barbieri)도 모르기는 마찬가지다. 반주자가 설명해 줄 때 조금 적어 둘 걸 그랬나 보다. 집에 와서 찾아보니 작곡가도 그들의 오페라에 대해서도 우리말로 된 설명은 찾기 어렵네. 두 번째 곡, “비둘기의 노래” (Canción de Paloma)는 비둘기라는 별명을 지닌 여주인공이 자신의 모습을 비둘기에 빗대어 노래했다는 것 정도만 기억난다. 두 곡 모두 우리가 쉽게 상상하는 스페인을 우리 눈앞에 가져다준다. 귀로 듣는 음악이 눈앞에 환상이 되어 나타나다니! 특히나 비둘기를 노래하면서 소프라노는 마치 자신이 비둘기가 된 듯하다. 허리부터 발끝까지 타이트한 드레스를 입은 연주자가 귀여움과 요염함 사이를 살짝 넘나들며 몸을 꼬아 노래할 때엔, 처음 반주가 시작될 때 박자 맞추어 박수를 치려다가 그만두었던 관객들 사이에서 분명 후회하는 한숨이 들리는 듯했다. 앙콜곡이었으면 6.25 때 난리는 난리도 아니었을 난리가 났을 것이다. (ㅋㅋ)  나는 더 이상 만년필을 쥐고 있지 않았다. ‘이 정도면 일어나서 박수를 쳐야 하는 것 아냐?’ 하는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고 있었지만 주변에 연주자의 어린 제자들이 없다. 아무 생각 없는 녀석들이 있어야 하는데 말이다. 조금만 기다려 보기로 한다. 그 대신 무대 위로 함성을 보냈다. “Bravo! Exellente!! Encore!!!” 몇몇이 분명 내 뒤통수에 대고 뭐라 한다. “쟤 누구냐?”


앙코르는 딱 한 곡을 준비했단다. 냉정한 것! 그런데 늘 그녀의 공연에서 그랬듯이 “감사”의 인사를 덧붙인다. “오늘은 저의 초등학교, 중고등학교, 대학교의 은사님들께서 모두 와 계십니다.” 물론 다른 모든 관객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하는 것을 잊지 않았지만, 연주자는 스승들을 모시고 뜻깊은 연주를 했으며, 특히나 구순을 맞이하시는 성악 선생님께 자신이 최선을 다한 연주를 들려드릴 수 있었음을 진심으로 감사하는 마음이었다. 마지막 앙콜곡은 “은혜 아니면”이라는 찬송이다. “완전한 사랑 주님의 은혜로 새 생명 주께 얻었네”라고 부를 때에 연주자는 오른손 세 손가락을 보이며 노래했다. 이 찬송을 잘 모르는 나는 “세 생명을 얻었네”로 이해했고, 여러 가지 상념으로 붉어진 눈시울이 넘치고 말았다. 물론 내 추론들은 나중에 내 오해로 밝혀졌지만……

그래 바로 이거야.


    “이제 나 사는 것 아니요

    오직 예수 내 안에 살아계시니,

    나의 능력 아닌 주의 능력으로

    이제 주와 함께 살리라.”


내가 일어섰다. 가장 열렬한 박수를 보내면서! 가장 높이 들어 박수를 치면서! 흠, 지금 일어선 사람은 나밖에 없는 듯하다. 그렇지만 그게 대수냐! 내가 오늘처럼 감격했던 음악회가 몇 년 전 플라시도 도밍고를 홍콩에서 만난던 것 외에는 기억에 없는 듯한데!


음악당을 들어서기 전, 그리고 연주가 끝난 후 음악당을 나선 이후의 이야기들은 여기에 담지 않는다. 오로지 연주 속에서 내 마음을 붙들고 흔들었던 감상들만을 되새겨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예당을 돌아서 나오면서 발길이 잘 떨어지지 않았다. 그 많은, 그 다른 사랑의 노래들이 귓가를 떠나지 않아서……


그제야 프로그램에 적힌 독창회의 제목이 눈에 들어온다.

‘그래, 오늘 공연은 제목(La Musica Dolce)처럼 달콤하고 아름다웠구나. 친구야, 잘했다.!’


P.S. 글 안에 잘못되거나 틀린 내용은 모두 나의 부정확한 기억이나 부지 또는 무지의 소치이며, 글의 내용은 오로지 나만의 개인적인 감상임을 미리 밝히고 양해를 구한다.



2015년 초, 아직 겨울이 채 끝나기 전 어느 날...


(표지 사진은 인터넷에서 퍼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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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brunch.co.kr/@690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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