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메리카에 터잡은 코리안의 삶과 언어를 따라가 보기
벌써 새봄.
귀국을 두 달여 앞둔 시점이 되었다.
미국 생활이 제법 익숙해진 대신 서울 풍경이 조금씩 희미해지는 와중이다.
지난 달에는 미국 서부 LA에 다녀왔다. 학술대회 참석과 연구 자료 답사를 겸한 짧고 알찬 여행. 동부와 서부는 참 많이 달랐다. 온화한 기후 때문인지 듣던대로 홈리스도 엄청 많았고, 거리의 풍경에서 수목의 품종까지 모든 것이 낯설어 보스턴과는 다른 나라처럼 느껴졌다.
낯선 곳을 호기심이 이끄는 대로 탐방하며 얻는 지적 자극은 무척 컸다. 새 연구 주제로 미국 초기 한인들의 한국어를 연구하고 있어서 LA 곳곳 한인들의 흔적을 즐겁게 뒤쫓았다.
안젤루스 로즈데일 공동묘지 (Angelus Rosedale Cemetery)
비행기 내리자마자 가장 먼저 찾아간 곳. 100년 전 이곳에 터잡았던 한인들이 많이 묻혀 있는 곳이다. 당시 유색 인종이 차별 없이 묻혀 쉴 수 있었던 몇 안되는 공동묘지라고 한다.
초기 한인들의 정부 구실을 했던 대한인국민회에서 독립유공자의 묘지 지도를 만들어 두어 묫자리 찾기가 수월했다. 독립유공자 뱃지까지는 못 받았어도 충분히 신실한 국민이었을 한인들의 묘지도 쉽게 눈에 띄었다.
양지바른 곳마다 미국 스타일과 한국 스타일이 섞인 묘비들이 반질반질 빛나고 있었다.
미국 초기 한인은 대체로 대한제국 시기나 일제강점기 초에 본국을 떠났다. 하와이 사탕수수 노동자로, 그들과 결혼하기 위한 사진 신부로, 일제가 싫었던 정치 망명객으로, 이유는 저마다 달랐지만 모두 더 나은 삶을 찾아 미국 서부에 모여들었다.
본국과 떨어져 좁은 사회에 사는 사람들의 언어는 잘 변하지 않는다. 주류 언어인 영어 속에서 한국어는 더 보수적으로 남고, 과거의 모습이 오래 보존된다.
50~60년대에 돌아가신 한인들도 평생 써온 옛 표기 그대로 묘지에 이름을 남겼다. LIM이기도 림이기도, 졔슌이기도 Jaysoon이기도 하였을 그들은 어릴 적 희미한 기억으로 남은 조국을 그리워하며 LA 땅에서 눈을 감았다.
LA 한인타운
학술대회날 외에는 내내 거대한 LA 한인타운을 돌아다녔다. 수십 년의 악착같던 세월과 비극적인 순간마저도 모두 켜켜이 쌓인 한인타운. 이곳은 60년대 이후 물밀듯이 들어온 '아메리칸 드리머'들이 하나하나 쌓아올린 곳인데, 여기서도 시간은 느리게 흐르고 있었다.
거리의 간판이며 프라자로 불리는 쇼핑센터의 모습까지, 초등학생 때 보던 00년대의 풍경을 닮아 있었다. LA에서 만난 젊은 한인 2세들은 한인타운이 어렸을 때 모습 그대로고, 이제 어른들이나 간다고 했다. 1세대 한인들이 개척했던 이곳은 그들이 기억하는 한국의 모습 그대로를 유지하고 있었다.
언뜻 경기도 남가주시 나성동 같은 이곳이 캘리포니아주 LA라는 것은 언어를 통해 느낄 수 있었다.
간판이나 안내판에는 익숙함 속에 생경한 단어들이 돋보였다. 식당이며 프라자며 사람들이 모인 곳에서는 신기한 표현들이 돋들렸다. 한국을 떠난 시기는 제각기 다르겠지만 저마다 편하게 느끼는 한국어에 영어가 스며들어 있었다.
LA 한인타운의 언어 경관
일부러 두 번이나 찾아가서 겨우 맛본 한밭설렁탕. 들어가는 순간 냄새며 식탁이며 한국 방송이 흘러나오는 TV까지, 여기가 대전이구나 느끼게 해 주는 식당.
친절한 한국인 직원들은 포장하러 온 손님들에게 계속 이렇게 물었다. "투고에요 여기에요?"
일상에서 늘 쓰는 단어는 입에 붙어버린다. ‘포장’ 두 글자나 ‘투고’ 두 글자나 발음하기는 똑같이 쉬운 것 같은데 식당 직원들은 모두 ‘투고’라고 말했다. 길거리 간판에서도 ‘포장 가능’보다는 ‘To go 환영’이 붙어 있었고, 미주 한인 커뮤니티에서도 투고라는 표현을 심심찮게 찾아볼 수 있다.
‘투고에요 여기에요?’는 ‘For here, or To go?’를 직역한 표현일 테다. 나의 단어사전에 투고는 논문투고밖에 없는데, 포장을 뜻하는 투고는 Togo를 늘상 듣고 사는 미주 한인들에게 널리 퍼진 일상어가 되어 있었다.
대중식사라는 말은 90년대생인 나에게는 처음 듣는 단어다. 오래된 음식점 간판에서 대중음식점이라는 말은 간혹 본 것 같고, 국어사전에는 ‘대중식당’이라는 말이 “대중을 상대로 하여 값싸고 간편한 식사를 제공하는 식당”이라는 의미로 실려 있다.
뉴스라이브러리를 찾아보면 대중식사는 70~80년대까지는 많이 쓰였다. 누구나 와서 값싸게 점심 저녁 사먹는 밥집을 두고 대중식사집, 대중식당, 대중음식점이라고 했던 것 같다. 무튼 LA 한인타운에서 마주한 대중식사라는 간판은 그 단어가 한인들이 얼마나 자주 쓰는 단어인지는 몰라도 꽤 이색적이었다. 이 ‘산山’이라는 대중식사집은 70년대부터 장사를 한 것 같은데 이름에 걸맞게 죽이나 찌개, 탕 같은 것을 판다.
https://youtu.be/FUyk0hNG4yQ?si=8PQwepwEhprMe9dZ
미국의 한국 사람끼리 먼저 쓰인 말은 그 단어대로 굳어져 있다. 한인타운에서 본 모든 베트남쌀국수집 간판에 ‘월남국수’로, 모든 버블티집에 '보바'로 적혀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월남쌈은 알지만 월남국수? 상당히 낯설고 재미있는 표현이었다.
옛날 신문을 찾아 보면 우리나라에서는 70년대 말 베트남 전쟁 이후에 이색적인 외국 음식으로 ‘월남국수’, ‘월남만두’ 같은 단어가 간혹 나왔다. 하지만 당시로서는 베트남 음식이 대중화되지 못해서 널리 쓰이지도 못했고 사전에도 실리지 못했다. 그 '월남국수'가 미주 한인사회에서는 널리 쓰이고 있었던 것이다.
80년대 미국으로 이주한 한인 중에는 베트남 참전 용사들이 많았다고 한다. 아마 이들의 입말에서 월남, 월남 하던 것이 미국에서 먹는 베트남 국수를 ‘월남국수’로 부르는 데 일조하지 않았을까 싶다.
(내 기억에 2000년대 말쯤부터 포메인 같은 베트남 식당이 늘어나고 유행했는데, 음식 이름으로는 ‘베트남쌀국수’가 그대로 굳었다. 지금 ‘월남’이 들어간 음식 이름은 월남쌈밖에 없다. 아마 한국에서는 60-70년대 처음 맛보게 된 베트남 음식 중에 월남쌈만 입맛에 맞았던가 보다.)
보바티도 한국에서는 버블티로 통하지만 여기서는 모두 보바로 부르고 있었다. 2011년 중국에 갔을 때 버블티를 처음 먹어보고 눈이 번쩍 뜨였던 기억이 있다. 공차가 우리나라에 들어온 해가 2012년이니 한국에서는 버블티가 제대로 상륙한 지 10년 남짓밖에 안됐고, 처음부터 모두가 그걸 버블티라고 불렀다.
미국에서는 버블티가 2000년대 초부터 이미 인기 음료였다고 한다. LA에 ‘보바타임(It's Boba Time)’이라는 브랜드가 2003년에 창업하여 큰 인기를 끌었다고. 그렇게 미국 한인들은 버블티를 국내 사람들보다 먼저 먹었고, 먼저 사랑했고, 보바티라는 중국계 차용어이자 영어 이름을 그냥 계속 쓰고 있었다.
몇년 전 유행한 피식대학의 한사랑산악회에서 배용길이라는 캐릭터는 1976년부터 미국에 살다 귀국한 재미 교포 출신이다. 그는 특유의 미주 한인 말투를 살리려고 과장된 영어 발음을 쓰는데, '샤핑'이며 '완 한드레드'하는 그의 발음이 프라자 곳곳의 안내판에서 들려오는 듯했다.
내가 연구하는 초기 미주 한인의 영어 표기법도 본국과는 사뭇 다르다.
그들이 영어를 어떻게 발음하고 어떻게 적었는지, 그들의 영어 발음에 한국어가 어떻게 녹아들어 있는지는 아직 많이 밝혀지지 않은 연구 대상이다.
나는 늘 문화가 언어에 녹아드는 모습을 궁금해 하고, 재미있어 했다.
미국이라는 공간에서 삶을 개척했던 한인들의 한국어에는 미국이, 영어가 어떻게 묻어나는가.
끝없는 호기심과 상상을 촉발시키는 질문. 미국에서 이 흥미롭고 소중한 질문을 얻었다.
발굴되지 못한 채 묻혀버린 미주 초기 한인의 목소리를 속속 꺼내어 보며 남은 미국 생활을 마무리하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