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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더링과 케이터링의 거리

마지막 일정, LA 답사의 기록

by 너도밤

손꼽아 기다리던 귀국을 한 달여 앞두고 2주의 서부 여행을 다녀왔다.

시카고에서 미국 학회 데뷔 무대를 마치고 곧장 떠난 길이었다.

상항에서 나성까지. 샌프란시스코에서 엘에이까지.


대자연을 한 번은 보고 떠나겠다는 생각에 이틀 동안 돌아다닌 요세미티는 듣던 대로 절경이었지만, 조금 무리했는지 속이 제대로 꼬여 낯선 샌프란시스코에서 죽을 찾아 기어다녔다.


그나마 LA로 넘어와서는, 그래도 한번 왔던 곳이어서 그런지 한국 음식 많은 곳이라 그런지 조금은 마음이 편했더랬다.


힘 빼고 돌아다닌 6월의 LA에서 새로운 어휘를 또 하나 건졌다.

한남체인부터 올림픽가를 따라 이어지는 옛 한인타운에서 세네 번이나 눈에 띄던 단어, 캐더링.


여러 반찬을 도시락 용기에 담아 여러 명이 밖에서 먹을 수 있도록 배달해 주는 서비스를 여기서는 캐더링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한인타운에서 쉽게 눈에 띄던 단어 '캐더링'


catering이라는 단어를 내가 처음 들은 것은 몇 년전 학술행사를 준비하면서였던 듯하다.

행사장에 모인 사람들이 수다 떨며 음식을 나눠 먹을 수 있도록 작은 핑거푸드들로 뷔페를 차려놓는 것, 혹은 큰 커피 통을 갖다 놓고 각자 따라 먹을 수 있게 해 놓는 것.

그것이 내가 아는, 최근에 한국에서 종종 듣게 되었던 케이터링 서비스다.


한인타운에서 사용하는 캐더링도 지칭 대상이 크게 다르다고는 할 수 없지만 이 단어가 '캐더링'으로 널리 불리고 있다는 점이 생경했다. 지난 3월 답사에서 발견한 '월남국수'와 '베트남쌀국수', '보바티'와 '버블티' 정도의 거리를 가진, '미주 한국어'의 변이어라고 느껴졌다.


구글에 '캐더링'을 검색하면 대부분 미국의 한인 업소들이 검색된다.

이미지 검색으로 비교해도, '캐더링'은 한식 도시락 이미지들이 걸리고, '케이터링'은 (조금 고급스러운) 행사용 음식이 노출되는 차이가 있었다.


'캐더링'을 검색하면 대부분 미국의 한인 업소들이 노출된다.


구글에 '캐더링'을 검색하면 한식 도시락들이 나오고, '케이터링'을 검색하면 샌드위치나 핑거푸드류가 나오는 차이. 내가 아는 케이터링은 후자다.


한국에서 '케이터링'이라는 단어를 흔히 듣게 된 것은 내 기억으로 5년 남짓밖에 안된 것 같은데, 미주 한인들은 영어의 catering을 더 일찍 듣고 어휘에 수용했던 듯하다.


catering[ ˈkeɪtərɪŋ ]을 '캐더링'으로 받아들인 것은 한국어 특유의 발음 습관이 반영된 결과일 텐데, 이 과정이 어떻게 되는 것인지는 조금 더 연구를 해 봐야 할 문제다.


일감으로는 '포테토'나 '도마도', '오도바이'처럼 이중모음은 단순화하고 't'소리는 'ㄷ'로 받아들이는 공통점이 떠오른다. 미주 한인들의 영어 차용어를 통해서는 일본어를 거치지 않고 영어를 한국어로 직접 받아들일 때 어떤 특징들이 반영되는지 살펴볼 수 있을 테다.


한국어에 들어온 영어.

캐더링과 케이터링 사이의 거리.

계속 머릿속을 감도는 화두들이다.




USC Specialized Research Collections


LA 마지막날에는 반트럼프 시위로 거리가 긴장감으로 가득했다.

이날은 희귀 콜렉션 소장본을 실물 열람하기 위해 두 번째로 USC를 방문했다.

화수목 1-5시만 운영하는 줄을 뒤늦게 아는 바람에, 하필 금요일부터 월요일까지였던 일정을 바꾸어가며 겨우 하루 얻은 열람의 기회.


USC 도헤니 도서관 내에 위치한 Rare book room. 현재는 화수목 1-5 pm만 열람 신청이 가능하다.


처음 하는 예약이고 이것저것 다 서툴러서, 열람 신청한 5건 중 3건은 연구 가치가 크지 않은 허탕이었고 가장 열람하고 싶었던 1건은 도서관에서 한 달 동안이나 자료를 못 찾아 끝내 보지 못했다.


유일한 소중한 발견은 Helen Paik Chen Papers라고 이름 붙은, 백씨네 가족의 개인 기록물. 평양에서 언더우드, 새뮤엘 모펫 등 선교사를 만나고 목사가 된 백신구는 아내와 열 살 여섯 살배기 아들, 딸을 데리고 1905년 하와이로 건너갔다. 1906년 샌프란시스코를 통해 미 본토로 들어와서는 안창호 등 한인들이 한인 타운을 이뤘던 리버사이드에 잠시 정착했다.


Helen Paik Chen은 백신구 목사의 첫째 아들 백명선의 첫째 딸이다. 말하자면 한인 3세.

10형제의 맏아들로써 부모를 도와 착실하게 생활했던 백명선과 그 가족들의 소박한 생활상을 들여다볼 수 있는 기록물들이다.


한글 편지, 국어학교 교재를 비롯한 소중한 한글 자료가 많았는데, 특히 한인 주소록, 가계부 등 노트 자료에서 초기 한인의 언어 생활을 살펴볼 수 있는 기록이 많이 나왔다.


Helen Paik Papers의 노트 자료. 1910년대 기록. 한인들의 일상 언어 생활이 많이 반영되어 있다.


이 자료들은 이름이 붙어 있지 않거나 USC에서 백명선의 장부(Meung Sun Paik's ledger)라고 부르고 있는 자료인데, 나는 여러 정황상 위 한글 표기만큼은 백명선이 아닌 아버지 백신구 목사의 기록이라고 판단하고 있다.


대부분 한인이 영어를 전혀 혹은 거의 하지 못하는 채로 미국에 도달했음을 생각할 때, 그들이 영어를 자신들의 어휘 체계, 음운 체계에 받아들이고 사용하는 모습에는 흥미로운 모습들이 있다. 모두 아직 본격적으로 연구되지 않은 분야라 생각하고, 그만큼 질문거리들이 많다.


최근 발굴(?)한 초기 미주 한인의 어휘 '그로서리 전방'을 여기서도 찾아 기뻤다.

한국어로 대체어가 마땅하지 않은, 미국의 소매점 grocery를 한인들은 원어 그대로 수용하되 익숙한 어휘인 '전방(廛房)'을 붙여 불렀다. 저마다 편한대로 부르니 grocery는 그로소리가 되기도, 그로서리가 되기도 했다.


이들의 한국어 변이가 오랜 기간 살아남았더라면 '캐더링'과 '케이터링' 이상의 거리를 가진 '미주 한국어' 어휘들을 지금까지도 들을 수 있었을는지 모른다.

안타깝게도 미 본토에 삼천여 명, 하와이까지 합쳐도 만여 명에 불과했던 초기 이민자 특유의 한국어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내가 이들의 어휘에 대해 '발굴'이라는 용어를 쓰는 이유는 오래된 신문지 구석에서만, 낡은 테이프 너머에서만 그들의 한국어만이 가진 특색을 건져낼 수 있기 때문이다.




여행이 끝나자마자 일주일 간 보스턴 세간살이들을 모두 정리하면 드디어 그리운 고국으로 돌아간다.

어쩌면 나는 이리도 한국을 사랑하는지. 일 년이 다 되도록 낯설기만 한 미국이지만 앞으로 수없이 더 올 수밖에 없으리라는 불길한 예감.

짐을 정리하며, 캐더링과 그로소리를 곱씹어가며 시골 할머니의 보리꼬리를 떠올린다.


서로 다른 문화가 만나는 곳에서 언어에는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한결같지만 막연했던 내 의문은 조금 더 구체적인 형태를 갖춰 미국 유학(?)의 수확이 되었다.

이 수확물을 거두어 어떻게 포장하여 세상에 내어 놓을지, 그것이 앞으로 남은 나의 몫이다.


얼마 전 짤로 돌았던 할머니 과일가게의 보리꼬리. 어디서는 부르크리, 어디서는 부록걸이가 되는, 누군가에겐 낯설기만 한 이름 broccoli.


한국어사 전공자의 미국 유학기,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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