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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 플러싱 한인타운의 언어 경관

어울려 살아가는 곳에서의 한글

by 너도밤

나의 돈 많은 연구소는 매년 모든 방문 학자들과 그의 가족들을 데리고 4일의 뉴욕 여행을 떠나 준다. 지난 LA 여행 이후 큰 감명(?)을 받은 나는 세 번째로 방문한 봄날의 뉴욕에서도 내내 한국인의 발자취를 따라 다녔다.


뉴욕 타운홀(The TownHall)


첫날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향한 곳은 타운홀. 중학생 때 좋아하던 가수가 무려 북미 투어를 하는데 신기하게도 뉴욕 방문 일정과 날짜가 딱 맞았다. 놀라운 마음 반, 신기한 마음 반으로 난생 처음 그의 단독 콘서트를 보러 갔다. 그것도 뉴욕에서!


맨해튼의 역사 깊은 공연장 타운홀에서 샤이니 온유가 단독 콘서트를 했다. 거금 삼백 달러를 기꺼이 지불하고서 멋쩍고 수줍게 응원한 90분.


누가 이 가수를 알까 싶었는데 웬걸 나 빼고 모두가 벅찬 얼굴로 울고불며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아련한 추억이나 곱씹으러 갔던 나는 공룡 소리를 내는 외국인 팬들 사이에서 멋쩍어하며 수줍게 노래를 따라 불렀다.


공연을 한 온유는 아마 몰랐겠지만 그가 미주투어 첫 공연을 한 이 장소, 타운홀(The TownHall)은 뉴욕의 한국 독립운동 사적지로 꼽히는 곳이다.

뉴욕 한인들이 1921년 3.1 운동 2주년 기념 행사를 열었던 곳이기 때문.


1920년대 당시 몇십 명밖에 안되었던 뉴욕 한인은 고국에서 3.1운동이 전개된 소식에 큰 감명을 받았고, 맨해튼 중심부에 위치한 이곳 타운홀에서 여러 차례 3.1절 기념식을 열었다. 필라델피아에서 활동하던 서재필 박사가 주축이 되었고, 한국 문제에 관심을 가진 뉴욕의 정치인들이 다수 참여했다.


1921년 1월에 개관한 유서 깊은 뉴욕 타운홀. 같은 해 3월 뉴욕 한인들은 이 세련된 건물에서 3.1운동 2주년 기념대회를 개최했다.

https://www.koreadaily.com/article/20240814201858303


내가 조사하는 미주 한인들의 신문 신한민보에서는 3.1 운동 일주일 후 고국의 소식을 대대적인 특집 기사로 전했다. 주 1회 간행하던 신문을 주 3회로 증편시키며 벅차고 흥분된 마음을 몇 달간 기사로 계속 쏟아냈다.


미국 땅에서 나라 없이 살던 한인들이 3.1운동 소식에 얼마나 감동하였을지, 당시 막 지어진 가장 세련된 건물에 뉴욕의 저명한 인사들을 불러 코리아의 인디펜던스를 외치며 어떤 눈물을 흘렸을지, 그 마음들을 가만히 떠올려 보았다.


뉴욕한인교회(The Korean Church and Institute)


유난히도 날이 좋던 둘째날에는 맨해튼 북부, 컬럼비아 대학 바로 옆에 위치한 뉴욕한인교회에 찾아갔다. 이곳은 백년 전 뉴욕에 머물던 한인이라면 누구나 찾아가 몸과 마음을 기대던 보금자리였다.


1920~30년대 유학생들의 활동과 언어를 연구하고 있어 일찍부터 이곳에 관심이 있었다. 현재까지도 매주 예배를 보는 교회이기에 미리 연락을 하고 방문 예약을 한 뒤 조심스럽게 벨을 눌렀다.


어려운 시절 뉴욕 한인들의 몸과 마음이 깃들었던 뉴욕 한인교회


역시 사적지인 이 건물 지하에는 곧 독립운동전시관이 개관될 예정이다. 목사님의 배려 덕에 개관 준비를 거의 마친 전시관 내부와 각 층의 공간까지 꼼꼼하게 살펴볼 수 있었다.


1930년대 대공황 속에 어려운 유학을 하던 뉴욕의 한인 학생들은 이 교회 3, 4층에서 먹고 자고 공부하며 서로 의지했다. 안익태는 아직도 이 교회에 남아 있는 피아노로 애국가를 작곡했고, 송기주와 공병우의 한글 타자기도 이 공간에 깃들던 시절 발명된 것이다.


지금은 깔끔하게 내부 인테리어를 마쳐 옛 공간의 흔적을 거의 찾아볼 수 없지만, 창밖으로 보이는 거리 풍경을 보며 이곳에서 하루를 마치고 시작했을 사람들의 삶을 상상했다.


교회 오른쪽에는 컬럼비아 대학, 왼쪽에는 시원하게 흐르는 허드슨 강과 공원이 자리하고 있다.


컬럼비아 대학의 동아시아 도서관(C.V. Starr East Asian Library)에는 1930년대 한국 유학생들이 기증한 도서들로 기초를 마련한 한국학 컬렉션이 있다. 특별히 찾는 자료는 없었지만 도서관이라도 구경하고 싶었는데, 요즘 불거진 정치적 이슈들 때문인지 일반인의 출입을 제한하고 있었다.


아쉽지만 컬럼비아 대학을 뒤로한 채, 유학생들이 마음을 달랬다는 허드슨 강변 공원에서 오후 내내 머물렀다. 양지 바른 곳 나무 등걸에 앉아 실컷 책을 읽고 낮잠도 잤다. 도심에서 조금만 벗어나도 평화로운 풍경과 고요한 자연의 소리가 안식을 주었다. 맨해튼의 또 다른 모습이었다.


뉴욕 플러싱 한인타운


마지막 날에는 뉴욕 한인타운을 찾아갔다.


맨해튼 시내에 코리아타운이라고 불리는 32번가를 먼저 방문해 봤지만 그곳은 코리아 타운이라기보다 코리아 상권에 가까운 곳이었다. 북창동 순두부와 뚜레주르 같은 몇 개의 한국 식당, 한국 카페와 한국 서점 등이 모여 있는 곳.


뉴요커들이 Hmart에서 한국 라면 사고 싶거나 POCHA에서 소주 마시고 싶을 때, 케이팝 들으며 음반 사고 화장품 사고 싶을 때 들르는 곳이 맨해튼의 32번가, KoreaWay였다.


맨해튼 32번가의 일명 '한국 타운'은 한국 식당이 밀집한 상권에 가깝다.


제대로 된 뉴욕의 한인타운은 외곽 지역인 플러싱에 분포해 있다.


LA에 이어 두 번째로 큰 한인타운이라는 플러싱 한인타운은 미국 동부에서 가장 오래되고 규모가 크며, 한인 이주민이 대거 유입된 1970년대 말~80년대 초부터 발달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더 동부로 가면 베이사이드 지역까지 넓게 분포해 있다고 하는데, 반나절 동안 겨우 플러싱의 몇 군데만 살펴볼 수 있었다.


뉴욕 공립도서관이 있는 브라이언트 파크에서 7번 지하철에 올라탔다. 왠지 지하철에 중국인과 인도인밖에 없는 것 같아서 특이하다는 느낌을 받았는데, 알고 보니 플러싱과 맨하탄을 연결하는 이 7번 지하철이 아시아인 집단 주거지를 가로지르고 있어서 옛날에는 오리엔트 익스프레스(Orient Express)라고도 불렀다고.


오리엔트로 안내해 주는 7번 지하철을 타고 종점까지 사십 분 남짓을 내달렸다. 메인 스트리트 역에서 밖으로 나가자마자, 별세계가 펼쳐졌다.


엄청난 유동인구와 중국어 노래, 중국어 간판, 이곳이 뉴욕 속 중국이구나 생각이 들게 하는 곳


휘황찬란한 중국어 간판들과 거리를 가로질러 다니는 수많은 사람들,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중국 노래와 대화 소리까지, 별안간 뉴욕 속 상하이에 똑 떨어진 듯한 느낌을 받았다.


플러싱이 차이나타운이기도 하다는 정보는 몰랐기 때문에 눈이 휘둥그레진 채 낯선 거리 풍경을 살폈다. 사람이 수없이 드나드는 뉴월드 몰을 잠깐 구경했는데, 쇼핑 카트를 놓는 곳에 형형색색의 장바구니가 주차되어 있는 이색적인 광경이 눈에 띄었다. 식료품 쇼핑을 마친 중국 할머니들이 번호표 같은 걸 내면 장바구니만 지키고 서 있는 직원이 각자의 장바구니와 바꿔 주었다. 미국 속 한국인이 그렇듯 미국 속 중국인도 그들의 라이프스타일을 미국에서 유지하고 있었다.


시끌벅적한 중심가에서 동쪽으로 20분 남짓을 더 걷자 하나둘씩 한국어 간판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코리아 타운의 본격적인 경계랄 것은 없었지만, 아파트 위주로 구성된 거주지를 끼고 물감이 섞이듯 어느 순간부터 한국인들의 생활 공간이 펼쳐지고 있었다.


플러싱 한인타운의 언어 경관


차이나타운과 맞닿은 플러싱 코리아타운의 풍경은 LA에서의 모습과 사뭇 달랐다. 가장 이색적이었던 풍경은 차이나타운과 코리아타운이 맞닿은 공간에서 각자의 언어로 각자의 손님을 맞이하는 간판들이었다.


한글로 한국 이름을 적어놓은 곳은 '한국인 업장이니 한국 손님 어서오세요' 하는 곳이고, 한자로 중국 이름을 적어놓은 곳은 '중국인 업장이니 중국 손님 어서오세요' 하는 곳이다.


섬세하고 꼼꼼한 소통이 필요한 의료 문제나 세금, 회계 문제는 같은 나라 사람을 선호하는 경향이 높을 테다. 차이나타운과 코리아타운의 접경지에서는 두 나라의 의사와 회계사들이 각자의 언어를 내걸고 각자의 동포들을 환영하고 있었다. 간판만 봐도 내가 들어가야 할 곳이 어디인지를 구별해낼 수 있다.


또 눈에 띄었던 특징은 한국인 상점에 중국어 간판이나 표기도 내걸은 경우가 정말 많았다는 것.


한국인이 운영하는 상점에서는 으레 중국어 표기도 함께 찾아볼 수 있다. 이 경우는 '한국인이 운영하지만 중국 손님도 환영합니다'를 간판으로 이야기하고 있는 셈이다.


한국 음식점들은 으레 '正宗韩式' 같은 홍보를 내걸며 "정통 한식"을 표방하고, 메뉴 이름에는 꼭 중국어도 같이 써 두었다. 한국인의 식당이지만 동네를 돌아다니는 중국인 손님들도 환영한다는 뜻을 내비친 것이다. 미용 시술병원 등 중국인에게 어필이 될 만한 사업장에는 더욱 "한국 연예인 미용 성형 전문"같은 문구를 큼직하게 붙여 두었다.


중국인의 상점에는 상대적으로 한글 표기가 적었는데, (옷가게나 화장품 가게에 뜬금없이 '언니'나 '동대문'을 써 놓아 한국 느낌을 준 것이 전부.) 한국인의 상점은 적극적으로 중국어를 써 붙여 인구가 더 많은 중국인 손님을 환영하고 있었다.


플러싱에 오래 거주하며 이 지역 한인사회에 대해 연구를 꾸준히 했던 민병갑 교수의 글을 통해 플러싱 지역을 더 이해할 수 있었다. 플러싱 지역에 사는 아시안이 11만 명인데, 중국인 인구가 한국인 인구보다 약 2.5배 정도 많다고 한다.


이곳에 차례차례 터를 잡고 살아온 중국 이민자와 한국 이민자는 음력설 행사를 같이 하고 가까운 친구로 지낸다고 한다. 한국에서야 '나는 한국인, 너는 중국인'이지만, 이곳 뉴욕에서는 결국 '우리 모두 아시아인'이 되는 까닭이다.


중국인 이민자와 한국인 이민자가 어울려 살아가는 이곳. 이곳에서 호박은 '주끼니'이자, 'Zucchini'이자, '水瓜'가 된다.




한국인 이민자와 중국인 이민자가 각자의 문화와 정체성을 가지고 낯선 땅 뉴욕에서 어울려 살아가고 있었다. 코리아타운을 알리는, 한국인을 환영하는, 그들에게 편안함을 주는 한글이 다른 민족에게 편안함을 주는 한자와 함께 어우러져 있었다. 어깨 맞대고 함께 살아가는 공간에서, 한글과 한자가 저마다의 역할을 해 내는 곳. 뉴욕 플러싱 타운의 언어 경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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