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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기적 해석가 Aug 30. 2021

이성의 마녀사냥

<안티크라이스트> 해석

 <안티크라이스트>를 다루기 위해서 영화를 총 3번 보았다. 1차와 2차 관람 때는 어떤 영화인지 전혀 감을 잡지 못했다. 3번째 영화를 보고 정리하니 비로소 무엇을 말하는지 알았다. <안티크라이스트>는 라스 폰 트리에 감독이 극심한 우울증을 앓고 있을 때 쓴 각본이다. 영화의 제목이 먼저 정해진 특이한 경우이며 영화에 주인공의 이름이 등장하지 않는다. IMDB에서 윌리엄 데포의 역할을 HE, 샤를로트 갱스부르의 역할을 SHE라고 했으므로 여기선 '남자', '여자'라고 지칭하겠다. 이후에 등장하는 해석은 필자 개인적인 해석이다.


 창세기에서 야훼는 혼돈에 질서를 부여해 세상을 만들었다. 에덴은 완전무결하고 하느님의 사랑을 느끼는 공간이다. 아담과 이브가 선악과를 먹기 전까지 에덴에는 사랑이 가득했다. <안티크라이스트>의 에덴은 질서에서 혼돈으로 나아간다. 불안하고 고통스러우며 죽음으로 가득 차 있다. 남자가 여자를 데리고 에덴으로 간 이유는 여자가 두려움을 직면하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에덴을 치유의 공간으로 여겼다. 그러나 에덴은 죽음의 공간이다. 에덴을 하느님의 사랑이 아닌 사탄의 교회로 가득 채운 설정은 말 그대로 Anti-Christ, 적그리스도를 의미한다.


남자(윌리엄 데포)는 자신의 아내인 여자(샤를로트 갱스부르)를 환자 이상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심리 치료사인 남자는 여자를 분석하고 해결할 과제라고 여긴다. 에덴에서도 마찬가지이다. 피라미드를 완성하기 전까지 여자의 말을 논리적으로 분석하며, 오류를 집어낸다. 남자의 특징은 다음 대사를 통해 알 수 있다 :

HE : Acorns don't cry, you know that as well as I do. That's what fear is, thoughts distort reality. Not the other way around.

 여자는 도토리의 울음소리가 들린다고 말했다. 남자는 도토리는 울지 않는다며 여자의 공포감이 현실을 왜곡할 뿐이라고 반박한다. 심리 치료사인 남자는 아이러니하게도 감성 대신 이성으로 접근한다. 남자는 이성을 상징한다.


 여자(샤를로트 갱스부르)는 아이를 잃은 슬픔에 사로잡혀 있다. 여자는 남자에게 섹스를 강요하고, 폭력을 행사한다. 감정에 따라 행동하는 여자는 본능을 상징한다. 영화에서는 NATURE라는 말을 자주 사용한다. Nature는 두 가지 의미를 갖는다. 첫째는 자연이라는 뜻이고, 둘째는 본성이라는 뜻이다. 따라서 여자는 자연도 상징한다. 이때, 여자는 "Nature is satan's church."라는 말을 한다. 자연은 사탄의 교회로, 악으로 가득하며, 아름다운 에덴엔 죽음이 가득하다. 여자는 스스로를 악으로 정의한다. 여자는 (다시 말하지만, <안티크라이스트>는 주인공 이름이 등장하지 않는다. 대명사로 각 캐릭터를 지칭한다.) 닉과 방문한 에덴에서 이를 깨달았다. 지난여름, 여자가 들은 울음소리는 닉의 울음소리가 아니었다. 울음은 자연의 울부짖음이고, 외롭고 우울한 여자 내면의 울부짖음이다. 여자가 힘들 때 남편은 그녀의 곁에 있지 않았다. 극심한 우울증을 앓고 있을 때, 주변에 아무도 없던 라스 폰 트리에 감독의 감정을 대변한다.


 현대 사회는 이성을 선(善)으로 본능을 악(惡)으로 규정한다. 더 나아가서, 이성의 총체인 문명은 선이고 야만의 총체인 자연은 악이다. 집안에서 남자와 여자는 이성과 본능을 상징한다. 에덴에서는 문명과 자연의 상징으로 확장된다. 문명은 자연을 치료해야 할 대상으로 바라본다. 문명 입장에서 자연은 개척되지 않은 야만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아름다운 에덴에 조차 집을 지었다. 문명의 남자는 자연의 여자를 치료하고자 한다. 여자가 두려움을 직면해도 별 일이 벌어지지 않음을 보여주는 방식으로 말이다. 이 치료법은 감독이 우울증을 치료하기 위해 사용한 방식이다. 라스 폰 트리에 감독은 이 치료법이 이성이 본능을 파괴하는, 다시 말하자면 문명이 자연을 파괴하는 구조로 보았다. 즉, 본능을 대상으로 한 이성의 마녀사냥과 다를 바가 없다.


  마녀 사냥은 15세기 초부터 시작하여 16~17세기에 주로 자행되었다. 주된 목적은 기독교(Christ)를 와해시키는 반 그리스도(Anti-Christ)를 잡아내기 위함이었다. 이때, 반 그리스도는 마녀로 대표된다. 당시 사람들은 악마의 존재를 믿었다. 악마의 부름을 받은 마녀들이 사회에 숨어 믿음을 저해한다고 믿었다. 정부에서는 마녀 사냥을 통해 기독교 중심의 결속력 강화, 사회 유지 기능을 기대했다. 주로 힘 약한 여성들이 마녀 사냥으로 희생되었다. 마녀 사냥은 Christ를 위해 Anti-Christ를 사냥하는 악습이다. <안티크라이스트>에서는  문명과 이성을 Christ로, 자연과 본능을 Anti-Christ로 여긴다. 문명과 이성은 현상 유지와 체제 강화를 위해서 자연과 본능을 화형에 처한다.


 이성의 치료는 본능을 죽였다. 추락하는 도토리와 빗물, 우박 등 에덴의 자연은 남자(문명)를 쫓아내려고 한다. 영화는 추락하는 도토리, 둥지에서 떨어진 새끼 새, 닉, 비, 우박, 샤워기 물 등 죽음의 상징인 하강의 이미지로 남자를 공격한다. 그러나 남자는 견고하다. 여자의 죽음 이후 하강의 이미지는 불, 사다리, 산을 통해 상승의 이미지로 바뀐다. 상승의 이미지는 치료를 상징한다.

 상승 구조의 피라미드는 남자가 여자를 치료하기 위해 만든 표이다. 피라미드의 가장 아래부터 LEAVES와 TREES, WOODS, EDEN(Garden), 가장 위에는 ME가 올라간다. 남자는 HERSELF가 아닌 ME라고 썼다. 그렇다. 여자는 내면의 악과 본능을 파괴하려는 남자 모두를 두려워한다. 여자는 지난여름, 마녀 사냥의 부조리함과 비판 대신 정당성을 수용했다. 여자는 Anti-Christ를 수용했다. 이후 그녀는 스스로의 음핵을 거세하고 완전한 마녀가 되었다. 본능의 총체인 마녀는 이성을 죽이려고 한다. 그러나 견고한 이성은 여자와 본능을 마녀 사냥한다. 비로소 치료는 끝났으며, 더 이상 치료할 대상이 없는 남자는 에덴을 탈출한다.


 창세기와는 달리 남자는 에덴에서 쫓겨나지 않는다. 스스로 탈출한다. 탈출하던 중 산딸기를 먹는다. 산딸기 앞에는 세 거지가 기다리고 있다. 비탄, 고통, 절망이 세 거지라고 불리는 이유는 이성을 좀먹기 때문이다. 사슴, 여우, 까마귀의 동물 형상은 세 거지가 자연물, 즉 본능임을 보여준다. 세 거지는 끝까지 쫓아왔고, 본능이 죽어도 사라지지 않았다. 남자는 산딸기를 먹는 순간 모두 깨닫는다. 본능은 파괴할 수 없다. 본능은 내재하며 우리의 근간이다. 그것이 본능을 Nature라고 부르는 이유이다. 자연 위에 문명이 세워졌다고 해도 자연은 손상을 입을 뿐, 완전히 파괴되지 않는다. 완성된 건물의 외벽을 타고 담쟁이덩굴이 올라오기 마련이다. 남자가 깨닫는 순간 수많은 여자들이 둘러싼다. 남자의 치료는 틀렸다. 아니, 문명의 치료는 틀렸다. 얼굴이 없는 수많은 여성들은 현대 문명의 치료 중 희생당한 마녀, 즉 본능을 의미한다.


 라스 폰 트리에 감독은 자신의 우울증 치료를 바탕으로 영화를 만들었다. 현대 사회는 이성과 문명을 선으로, 본능과 자연을 악으로 규정한다. 다시 말하면, 이성과 문명은 Christ이고, 본능과 자연은 Anti-Christ이다. 감독이 받았던 치료법은 이 Anti-Christ를 화형 하는 방식이었다. 필자가 해석한 시선 말고도 다른 시선으로 해석할 수 있다. 다양한 해석을 찾아보시길 추천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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