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고 도는 폭격사
"We’re going to bomb them into the Stone Age.(폭격을 통해 석기시대로 돌려놓겠다.)"
-커티스 르메이-
석기시대 마니아라는 별명을 가진 제5대 미 공군 참모총장 커티스 르메이가 한 말입니다. 미사일과 폭탄이 눈앞에 당면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폭격만능주의를 대표하는 말입니다. 스탠리 큐브릭 감독의 영화 <닥터 스트레인지러브>의 부제, “걱정을 멈추고 폭탄을 사랑하는 법을 배운 법 (Or how I learned to stop worrying and love the bomb)”과도 일맥상통합니다. 1960년대, 미국과 소련의 핵 위기 격상과 무기 개발, 냉전 시기의 사람들이 가졌던 공포를 익살스럽게 풀었습니다.
미국과 소련의 냉전 체제와 군비 경쟁이 악화되던 시기, 미 공군의 잭 리퍼 장군(★)은 소련의 공격이 시작됐다는 정보를 맨드레이크 대위에게 하달합니다. 이내 전 비행 기지에 적색경보와 기지 폐쇄 명령이 떨어지는 한편, 핵 미사일을 실은 B-52 폭격기를 소련으로 배치하는 ‘프로젝트 R’이 실행됩니다. 그러나 소련 공격은 거짓이었습니다. 이 사실을 들은 각 정부 처장과 소련 대사는 대통령과 전쟁 상황실에 모여 이야기를 나눕니다. 소련 대사는 만약 폭격기가 소련에 접근한다면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를 없앨 수 있는 둠스데이 머신이 작동한다고 말합니다. 이를 막을 방법에 대해 나치 독일에서 망명한 스트레인지러브 박사에게 자문을 구합니다.
<닥터 스트레인지러브>는 블랙 코미디입니다. 블랙 코미디란 부조리, 죽음과 관련된 어두운 주제를 익살스럽게 풀어내어 모순을 풍자하는 장르입니다. 웃음 뒤의 씁쓸함과 섬뜩함이 특징이죠. 유머의 방식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그중에서 <닥터 스트레인지러브>는 무지한 인물이 파멸을 향해 나아가는 와중 행하는 부조리에서 오는 웃음을 활용합니다. 맨드레이크 대위가 대통령과 통화하기 위해 공중전화를 사용하는 장면과 동전이 없어 코카콜라 자판기를 총으로 쏘는 장면이 대표적이죠. 전쟁 상황실에서 머킨 머플리 대통령이 “Gentlemen, you can't fight in here! This is the War Room.”이라고 말하는 아이러니도 마찬가지입니다. CRM114 보안 장치의 비밀 코드가 OPE입니다. 잭 리퍼 장군이 말하는 Peace On Earth와 Pure Of Essence의 약자를 적절히 조합한 단어입니다. OPE는 터지슨 장군이 말한 다음 대사와 연결됩니다.
“When the Russians see that on their radar, they are going to go absolutely ‘APE’”
러시아인들이 레이더에 잡힌 폭격기를 보면 완전히 야만인(APE)이 될 것이라는 말인데요. 이를 묘사하는 터지슨 장군과 잭 리퍼가 더 야만스럽습니다. 잭 리퍼를 비롯한 미국인 기득권 또한 야만적임을 강조하며 APE와 OPE를 연결합니다.
<닥터 스트레인지러브> 등장인물 이름에는 의미가 있습니다. 먼저, 터지슨 장군은 ‘과장된’이라는 뜻을 가진 영단어 ‘Trugid’에서 왔습니다. 양팔을 벌려 비행기를 묘사하고 큰 소리를 지르며 과장된 표정을 보이는 모습에서 따온 이름입니다. 공군부대의 장군 잭 D. 리퍼는 영국의 살인자 ‘잭 더 리퍼’가 어원입니다. 잭 더 리퍼는 날카로운 외과용 칼로 살인을 저질렀다고 합니다. 잭 D. 리퍼 장군은 자신의 부하들을 희생시켰고, 면도 중에 자살을 합니다. 외과용 칼과 면도날이 연결되죠. 맨드레이크 대위는 수면을 돕는 약품인 ‘맨드레이크 루트’에서 왔습니다. 죽음으로 내모는 잭 리퍼 장군을 안정화시키려고 했으나 실패하고, 살인자로 몰렸습니다. B-52 폭격기 조종사 ’T.J. King Kong”은 핵 미사일에 킹콩처럼 매달려 소리를 지르며 떨어집니다. 이렇듯 각 이름들에는 의미가 담겼습니다.
잭 D. 리퍼 장군은 성관계 시 힘 빠짐과 생기 없음의 원인이 공산주의자들의 극악무도한 불소 소독 때문이라고 믿습니다. 불소가 미국인들의 ‘순결’한 피를 더럽혔다는 주장이죠. 그는 증류수와 에틸알코올, 빗물만 받아 마셔 순결을 유지하려고 노력합니다. 더 나아가서 위 이유로 소련에 폭격기를 발진합니다. 잭 D 리퍼 장군이 골프 가방에서 꺼내드는 기관총을 기억하시나요? 맨드레이크 대위와 함께 기관총을 쏴서 육군 부대를 막아냅니다. 리퍼 장군의 기관총은 남성의 성기를 상징합니다. 영화는 전반에 걸쳐 성(性)에 대한 묘사가 등장합니다. 영화는 폭격기에 항공 급유를 하는 장면으로 시작합니다. 전혀 성적이지 않은 장면이 묘하게 에로틱하게 묘사됩니다. 항공 급유 항공기의 관은 남성의 성기를 대표합니다. 또한, 영화 마지막 장면에서 스트레인지러브 박사는 코발트 토륨 G의 반감기를 설명하며 지하 세계에서의 남녀 비율은 1 대 10이 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잭 D 리퍼 장군의 ‘순결’에 대한 이야기와 기관총, 스트레인지러브 박사의 성 비율, 남성성의 강조는 모두 연결됩니다. 남성으로 가득한 정치 기득권들을 풍자하는 장면이죠. 또한, 순결한 미국인의 피가 더럽혀진다는 말은 게르만족이 우월하다는 나치의 사상과 연결됩니다. 스트레인지러브 박사는 나치 독일에서 망명한 과학자이죠. 결과적으로 제2차 세계대전에서 승리한 미국이 본질적으로 나치, 소련과도 크게 다르지 않음을 강조합니다.
영화에는 껌이 자주 등장합니다. 터지슨 장군은 전쟁 상황실에서 항상 껌을 씹고, 맨드레이크 대위는 껌 종이를 가지고 불안을 표현합니다. 껌은 불안을 완화시키는 역할을 합니다. 저작(咀嚼) 행위는 긴장을 줄이는 효과가 있기 때문이죠. 야구 선수들이 껌을 자주 씹는 이유입니다. <닥터 스트레인지러브> 속 껌은 또 다른 의미가 있습니다.
껌은 씹어도 사라지지 않습니다. 단물을 빨아먹고 뱉으면 그만이죠. 즉, 일회성을 상징합니다. 전쟁 상황실에 모인 사람들은 모두 자신의 안위만을 지키려 합니다. 스트레인지러브 박사의 지하 생존 논리는 현재의 기득권을 유지하고 새로운 국가가 자신들, 더 나아가 남성을 중심으로 세워져야 한다는 주장입니다. 정치인들은 논리를 들으며 안심하죠. 전쟁 상황실에 있는 사람들에게 폭탄은 껌과도 같습니다. 사람이 얼마나 희생되던지 그저 씹고 뱉으면 되니까요.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볼까요. 부제 “Or how I learned to stop worrying and love the bomb”은 껌과 같은 의미입니다. 껌을 통해 걱정이 완화되고, 단물을 다 빨아먹고 나면 뱉어 버리는 책임감 없는 정치인들에 대한 풍자입니다.
영화는 핵과 재래식 폭탄의 폭발 몽타주와 노래 “We’ll meet again”으로 끝이 납니다. 결국 전쟁 상황실에 모인 자들이 다시 세운 국가는 같은 상황을 마주하고, 같은 과정을 거칠 것임을 암시합니다. 여태까지 수많은 전쟁들이 있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살상되었고, 재산 피해도 막대했습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전쟁은 반복적으로 일어납니다. 다시, “Or how I learned to stop worrying and love the bomb”으로 돌아옵시다. "다른 것 다 집어치우고, 폭탄 하나만 있으면 돼"로 돌아오는 우리들을 비추며 마무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