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이 되면 아빠들이 모여 아이들을 돌보고, 봉투에 담긴 금일봉과 함께 엄마들에게 자유시간을 주는 '여성해방의 날'이 있었다. 몇 년간 지속되었지만, 귀임 몇 해 전부터는 흐지부지 사라진 헝가리 교회의 전통이다.
평일엔 일한다고, 주말엔 골프 친다고 가족과 함께 하지 못하는 것이 미안해서인지, 이렇게 한 번 면피를 하고 계속 골프를 치시겠다는 잔머리인지는 알 수 없지만 여하튼 덕분에 엄마들은 금일봉을 챙겨 들고 시내로 향한다.
눈치 보지 않고 밤까지 놀 수 있는 날.
다들 십 대 소녀들처럼 들떠서 목소리 톤부터가 예사롭지 않다. 바찌 거리로 나가 이탈리아 레스토랑 'Comme Chez Soi'에 자리를 잡고는 음식이 나오기 전까지 삼삼오오 뷰티앱으로 사진을 찍는다.
"나이가 드니까 그냥 사진기로 사진을 못 찍겠어."
"맞아요. 주름에, 기미에 사진 찍기가 싫어요."
"늘 앱으로 찍으니 실제 거울 속 내 얼굴 보고 깜짝 놀랄 때가 가끔 있어요."
하하하하.
모두들 공감한다며 한바탕 웃는 동안 주문한 음식들이 테이블에 세팅된다.
사과를 조려 올린 푸아그라, 그릴에 구운 새우를 올린 샐러드, 하몽과 잘 어울리는 토마토 카프레제. 후식으로 나오는 토카이 와인과 셔벗 아이스크림.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는 여자들만의 식탁.
아이들 챙길 필요 없이 오롯이 나만을 위한 식탁. 맛있게, 우아하게, 식사를 한다.
식사가 끝나면 고흐가 그린 <밤의 테라스>가 떠오르는, 까맣고 푸른 밤 노랗고 따스한 조명이 불을 밝히는 노천카페를 지나 크리스마스 조명들이 반짝이는 거리로 나선다.
대형 트리 앞에서 천진난만한 웃음을 쏟으며 단체 사진도 찍어보고, 크리스마스 마켓을 돌며 막상 쓸 일이 없는 예쁜 쓰레기를 흥분해서 구입하기도 하고, 시나몬을 듬뿍 묻힌 굴뚝 빵 몇 개를 사서 사이좋게 뜯어먹으며 한국에 돌아가면 이런 굴뚝 빵 가게나 하나씩 차려서 하면 어떻겠냐고 창업의 꿈을 키우기도. 천사 날개 가로등 아래서 키스하는 젊은 남녀를 보고 어머어머어머를 연발하며 각자의 화려했던 연애담을 풀어내기도 하고, 아빠들이 아이들을 잘 챙기고 있는지 천상 엄마인지라 걱정도 해가며 거리에 가득한 사람들 사이를 지나 국회의사당 앞까지 걸어가 본다.
매일 봐도 매일 새로운 참 예쁜 국회의사당의 야경.
스냅사진 작가가 된 듯,
"이쪽에서 걸어가는 척하다 살짝 뒤로 돌아봐요. 뒤꿈치를 좀 들면서."
이런저런 주문으로 멋진 인생 샷을 찍어주고, 찍힌 모습을 보며 좋아라 손뼉 치는 우리.
12시가 되면 파티가 끝나고 다시 집으로 돌아가 아이와 남편을 돌보는 엄마, 아내의 자리로 돌아가야 하지만 마냥 신나 함께 웃고, 또 웃으며 채운 에너지로 이전과는 다른 엄마, 아내일 것 같은 느낌적인 느낌.
꼬물꼬물 손 많이 타던 아이들은 어느새 훌쩍 자라 이제는 손을 내밀어도 혼자 있고 싶어 하는 나이가 되었고, 함께 지내던 이들은 이제 헝가리, 한국, 미국, 캐나다, 필리핀, 중국.. 여기저기로 뿔뿔이 흩어져 다시 하나로 뭉치기엔 힘든 환경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