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정환
"어디서 만나?"
"아지트에서 볼까?"
"그러자고. 참 오랜만이네. 거기 아직도 벤치가 그대로 있나?"
"있을걸?"
오래된 아파트 가장 안쪽에 놀이터가 있다.
고층 아파트가 병풍처럼 가로 세로로 막아주어 외부와 단절된 느낌을 주는 곳이다. 놀이터 옆에 벤치 세 개가 나란히 일자로 서 있는데 그중 가운데 벤치가 우리의 아지트였다. 비가 오면 다 맞아야 했고, 겨울이면 추운 대로 버터야 했다. 여름이면 모기를 쫓아야 했고 아파트 생활 소음이 울려 퍼졌다.
왜 거기를 아지트라 했는지 알 수는 없지만 자연스럽게 약속 장소가 되었다, 아무래도 고등학교와 집에서 거리가 먼 곳을 선택했으리라 추측된다.
특별하거나 멋진 벤치도 아니었다. 네모 각목으로 만들어져서 틈새도 넓었다. 덕분에 오래 앉아 있으면 엉덩이와 허벅지에 나무 자국이 남았다. 이상하게 이 아파트에 들어오면 약속이나 한 듯이 습관처럼 그 벤치에 앉았다. 왠지 다른 벤치에 앉으면 뭔가 불편했다. 그 벤치에 앉아 들어오는 시야가 편했다. 사방이 아파트 경치였고 사람들에게 환히 보이는 장소임에도 뭔가 특별함이 있었다.
아파트가 있는 자리는 내가 태어난 곳이다. 사라진 나의 고향이다. 목동에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면서 허름한 집들이 모두 사라졌다. 논과 밭도 사라지고 여름 장맛비에 넘치던 하천도 메워졌다. 내가 태어났던 집과 골목도 자취를 감췄고, 초등학교 때 친구들과 야구하던 공터도 아파트가 가져갔다. 덩그러니 내가 다니던 초등학교만 남았다.
서울은 한번 개발되면 어디가 어디인지 구분이 어 려울 정도로 변한다. 그렇다! 그곳은 아파트 단지라기보다 우리의 추억이 묻어 있던 공간이라고 해야겠다. 눈에 보이는 건 회색빛 아파트지만 우리 머릿속에서는 벤치 어디쯤 우리가 뛰어놀던 골목이고 공터였다.
초등학교 시절, 학교 주변은 논과 밭이었다.
반에는 농사짓고, 돼지를 키우는 친구도 많았다. 친구 집에 놀러 갔다가 논에서 피를 뽑은 적도 있다. 미나리 밭에 들어가서 다리에 거머리를 붙이고 나왔던 곳이다.
공터도 많아서 글러브와 배트를 가지고 나와 끼리끼리 모여 야구하곤 했다. 작고 허름한 집들 사이로 작은 골목길이 많아 숨바꼭질하기도 좋았다. 하천 주변에는 판자로 된 무허가 건물이 많았다.
비가 많이 오면 하천이 범람해서 판자촌을 덮치곤 했다. 참으로 어렵고 힘든 시절이었다. 침수 피해로 친척이 우리 집으로 피난 오기도 했다. 지금은 복개천이 된 건지 아예 하천을 막아버린 건지 그렇게 자주 넘치던 하천도 사라졌다. 거기에 목동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며 집값은 역전됐다.
우리 동네는 변두리로 남았고, 목동은 따라갈 수 없을 정도로 비싼 땅으로 둔갑했다. 불과 도로 하나 차이로 땅값이 달라졌다. 초라한 곳에 머물렀던 우리 학교는 어쩌다 목동 학교가 되었다. 덕분에 우리 학교는 유명해졌다.
우리는 그 비싼 동네에 아지트를 마련했다. 우리가 뛰어놀던 그 장소가 아지트가 되었으니 우리 삶의 대부분을 여기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아파트가 들어선 지도 어언 40년이 다 되어가지만 내 기억 속에는 아직도 그때 그 골목이 떠오른다.
일명 덴뿌라(어묵) 공장이 우리 아지트 건너편에 있었다. 냄비를 가지고 가면 아주 저렴하게 가득 채워 올 수 있었던 곳이다. 친구들은 아직도 거기를 기억한다. 아지트에 앉아서 옛 추억이나 이야기하고 있어도 시간은 잘도 간다. 같은 시간과 공간을 나누었기에 우리 이야기는 잘도 통한다. 그 벤치에서 가장 싼 커피라고 자부하는 레쓰비 캔 커피를 들고 수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상하게 레쓰비여야 구색이 맞았다.
대학생이 되고 회사에 다니면서도 "커피 사 와!" 하면 그냥 레쓰비였다.
전화를 걸어 따로 이야기하지 않아도 '나와라' 하면
으레 여기였다. 언제인가, 술 마시고 귀가하던 날이었다. 마음도 복잡하고 우울한 기분에 아지트로 발길을 돌렸다. 비도 오는데 우산도 없이 거기를 왜 간단 말인가?
가로등 불빛 속에 흩뿌려지는 안개비가 마치 노랫말 가사 같았다. 기분도, 비 오는 날씨도, 어두운 벤치도 여간 청승맞은 게 아니었다.
기분 내다가 옷이 다 젖을 것 같은 현실감도 밀려왔다. 친구에게 전화해 볼까? 우산이나 가지고 나오라 할까? 전화기를 들어 번호를 검색하다 종료 버튼을 눌렀다. 비 오는 날 이 무슨 추태란 말인가? 여기서 비를 맞고 걸으면 집까지 족히 20분은 걸어야 했다.
나는 놀이터를 돌아 화단을 가로질렀다. 아무리 비 같지 않아도 이미 젖어서 앉을 수는 없을 테지만 상관없었다.
어라 이건 뭐지? 젖어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벤치에 선명하게 새겨진 하트가 눈에 들어왔다. 방금까지 누군가 앉아 있었던 모양이다. 나는 엉덩이를 잘 맞추어 자리에 앉았다. 희미한 온기가 전해지는 것만 같았다. 누군지 모르지만, 감사한 일이었다. 나는 엉덩이 하트를 통해 마음의 위안을 받는 것만 같았다.
"거기 내 자린데!"
그때 어디선가 목소리가 들려왔다. 음성이 들려오는 곳으로 고개를 돌려보니, 네온사인 불빛 아래에서 레쓰비 커피를 손에 들고 우산으로 얼굴을 가린 검은 그림자가 걸어왔다. 나는 그림자에 소리쳤다
"이거 너 엉덩이였어? 비 오는데 혼자 여기서 뭔 궁상이여?"
"그러는 너는 비 맞으면 뭐 하는 짓이여?"
그날 둘이 앉아서 어떤 말을 나누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그냥 비 오는 날도 약속 없이 만날 수 있는, 그걸로 좋았다. 아지트라면 그 정도는 돼야 하지 않겠는가? 시골이었다면 앞에 보이는 아파트가 숲이었겠고, 우리 앞에 보도블록이 냇가였을지도 모르겠다. 아파트에 울리는 사람들의 생활 소음이 새소리였을까? 그래도 별것 없는 이 장소에서 친구들과 많은 추억을 쌓았다.
어느 날부터인가 아지트가 마음에서 멀어졌다. 사회에 나오고 결혼하며 우리는 너무 바빴다. 가끔 전화 통화만 하고 어쩌다 한 번씩 여기에서 만났다. 그마저도 내가 경기도로 이사한 후에는 만만치 않았다. 뭐가 그리 바빴을까? 세월이 지나 벤치도 부스러지고, 페인트도 몇 번 덧칠한 흔적이 역력했다. 벤치 주변에는 개미집들이 많이 생겼다. 벤치에 앉아 있으면 개미를 털어내야 했다.
벤치가 낡아가는 것처럼 우리 삶도 나이를 먹고 낡아가는 것만 같았다. 아지트에서 만나는 친구들은 초등학교 2학년 때 같은 반이었다. 그러고 보니 수십 년 세월을 같이 보낸 친구 들이다.
나를 빼고 나머지 세 명은 아직도 동네를 떠나지 않았다. 덕분에 지금도 서울 가서 '나오지' 하면 여기로 통한다. 고향에서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음에 감사하다. 서울 변두리라 개발도 늦은 곳이 뭐가 그렇게 좋다고 평생을 사느냐고 농담도 던져본다. 그래도 친구들이 있고 아지트가 살아 있어 고향이라 부를 수 있지 않겠는가?
여기에 앉아 별을 봤고, 우주에 대한 말도 안 되는 개똥철학을 떠벌렸다. 군대 갈 걱정과 미래의 두려움에 담배를 나눴다. 이제는 다들 담배도 끊을 정도가 되었으니, 미래의 불안함이 건강 걱정으로 바뀌고 있다.
담배와 레쓰비 캔 커피 하나만 있으면 자유를 얻을 것 같았다. 이제는 캔 커피를 마시며 당 수치를 걱정한다. 아파트 들어선 지 오래되어 이제는 재개발 이야기가 나온다. 어쩌면 우리 아지트도 유효기간이 다 되어가는가 보다. 동네 놀이터가 아파트촌이 되었고, 이제는 초고층 아파트가 들어설지도 모른다.
그때는 지하상가 어디쯤에서 만나고 있을까? 골목길의 추억과 놀이터 벤치의 추억은 친구들의 기억 속에서만 살아 있겠다.
"친구야. 나 고향 왔다. 어디서 볼까?"
"거기서 만나."
"커피 사갈까?"
"캔 커피 안 먹는다. 설탕 없는 아메리카노로 사 와라."
아파트 들어가기 전 카페에 들러 아메리카노와 라테를 산다. 양손에 들고 도로를 건너 아지트로 향한다.
나이를 먹어도 여전히 그 자리에서 친구가 다리를 꼬고 손을 흔든다.
지금은 사라진 내 동네가 그리워 마음에 바람이 불지만 그때의 친구들은 여전합니다.
캔커피 한 잔 들고 시시껄렁한 농담을 주고받아도 우린 친구니까요.
정환이의 추억 속 벤치는 낡았지만 만날 수 있으니 쓸쓸하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