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화정
심장이 간질거린다.
음모는 일사불란하게 진행됐다.
이 계획은 나와 같은 반 친구 하나, 다른 반 친 구 셋, 모두 다섯에게 차례대로 전해졌고 주모자는 바로 나였다.
드디어 그날이 왔다.
언제쯤이 좋을까 기회를 노리다가 벽장에 있는 그것을 낑낑대며 내 방으로 옮겨놓는다.
가능하면 아무도 모르게 처리해야 하고 특히 부모님이 알면 안 되는 미션이다.
혹시 몰라 남동생을 시켜 망을 보게 하는 등 단단히 준비도 마쳤다.
친구들이 하나둘 우리 집다락방으로 모여들었다. 나는 간단한 요깃거리를 준비했고 부모님께 외박 허락을 받은 친구들도 파자마를 챙겨 이 밤의 거사를 위해 조용히 움직였다.
기대에 달뜬 열 개의 눈동자가 흑진주 빛깔로 반짝거린다.
다섯 소녀가 옹기종기 둘러앉은 머리 위로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겨울밤의 온기가 침을 꼴깍 삼킨다.
이층 양옥인 우리 집에는 다락방이 하나 있었다. 단층이었던 것을 부모님이 새로 고쳐서 이층으로 다시 지으면서 생긴 다락방이었다.
나는 그곳을 내 아지트로 사용하고 싶었다.
하지만 남동생 역시 다락방을 탐냈다. 다른 건 욕심내지 않았지만 이것만은 양보할 수 없다.
조용하고 말수가 적은 나는 평소에 하지 않던 아양에다 조르기를 더해서 엄마를 공략했다.
엄만 얘가 왜 이래? 하고 의아해하면서도 간절한 내 마음을 읽어주었다.
드디어 엄마에게서 허락이 떨어지자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기뻤다.
학창 시절이 마냥 행복했던 것만은 아니었다.
편안한 성격의 부모님과 상관없이 나는 세상의 고민은 다 짊어진 양 음울하게 사춘기를 치르고 있었다.
그러나 다락방에서 지냈던 몇 년은 용이 여의주를 얻은 것처럼 가장 충만한 시간이었다.
다락방에서 바라보는 밤하늘은 함께 듣는 별밤지기 이문세의 낭랑한 목소리가 되기도 하고,
내가 펼치는 공상은 총천연색 열기구가 되어 어딘지도 모를 먼 이국 하늘을 둥둥 떠오르게도 했다.
무엇보다도 친구들과 쓸데없이 꽁냥 거리는 아지트로서의 다락방.
몽환적인 상상으로의 발자국을 내딛는 세계였다.
새롭게 시작하는 모험의 아우라가, 지금도 그 냄새와 분위기가 가슴으로 달려들 듯 아련하다.
시험을 끝낸 수험생인 다섯 친구는 수능에서 해방된 기분을 어디에든지 풀어야 했다. 시험 전까지 바짝 조였던 끈을 느슨하게 내놓고 그동안 쌓였던 스트레스를 마구 비워내고 싶었다. 욕망에 이글거리는 다섯 계집애의 어설픈 일탈이 이곳 다락방에서 시작되고 있었다.
두둥.
내가 벽장에서 다락방으로 옮겨다 놓은 건 엄마가 아빠를 위해 담근 더덕주였다.
술이란 놈을 오늘은 꼭 마셔보고야 말겠다며 전의를 불태운다.
아빠와 동네 아저씨들이 모이기만 하면 부어라 마셔라 하는 이것이 도대체 무엇인지 궁금했다. 오늘에야말로 어른으로서의 첫걸음을 떼고 말겠다는 기백이 소녀들을 불태우고 다락방 천장을 뚫고 올라갔다.
넓은 병 입구를 조심스럽게 열었다.
그 안에 국자를 넣어 조심스럽게 잔에 한 잔씩 따른다.
병아리 눈물만큼씩 홀짝거려본다.
이게 뭐냐?
입술을 거쳐 식도를 타고 위장으로 싸하게 내려가는 그것은 박하를 집어삼킨 뱀 같았다.
마구 휘저어놓은 속이 화하게 뜨겁다.
처음 맛본 술의 오묘함에 놀라서 친구들 눈이 개구리만큼 커진다.
낄낄거리며 서로를 본다.
뭔 맛이 이리 쓰다냐, 하거나 그래도 뒷맛은 달다, 하는 소감이 비명처럼 터져 나온다.
이게 어른의 맛인가?
어른은 참 복잡하기도 하지.
이런 것을 거쳐야 인생의 맛을 아는 건가?
적게는 두서너 잔을, 많게는 다섯 잔을 연거푸 들이켠다.
캬.
소녀들의 흥분된 수다와 떠들기, 그리고 음악이 버무려진 다락방의 겨울 정취.
그것을 연거푸 마신다.
다음날 우리는 숙취라는 생애 최초의 경험을 한다.
속이 뒤집어지고 지구가 빙빙 돌다가 친구 둘은 토해버렸다.
다른 친구 둘은 새벽에 집으로 돌아가고 난 친구의 등을 두드려가며 어설픈 일탈의 뒤처리를 하느라 진땀을 뺐다.
지금도 가끔 나이 먹은 그때의 친구들을 만난다.
그 시절 다락방에서의 일을 얘기하면 내가 그랬다는 둥, 네가 그랬다는 둥, 타임머신처럼 순식간에 소녀적으로 간다.
각자 다른 곳에서 다양한 모습으로 살고 있지만 그때의 우리는 투명한 뇌와 담백한 가슴을 갖고 있었다는 공통된 답을 얘기한다.
우리가 함께 있던 다락방은 어리디어린 소녀의 좁은 계단을 지나 널따란 어른의 장으로 나아가는 삐그덕거리는 복도였다.
별과 달과 안온한 혼자만의 공상을 일삼던 곳.
복잡하기도 하고 모호하기도 해서 여전히 잘 모르겠는 성장의 통로.
그 통로가 되었던 다락방.
출간 후 제가 쓴 글을 다시 보는 건 생각보다 고통스러운 일이네요.
이 글은 출간된 책 속 내용을 (너무 엉망이어서 독자님과 출판사 사장님께 죄송합니다) 재구성해서 발행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