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경희
앞산에서 산비둘기 구구거리는 소리 들린다. 아버지의 삶만큼이나 고요한 잔두리에 간혹 들리는
산비둘기 소리는 평온하다. 거실로 들어오는 햇살에 아버지 곁에 눕는다. 100세 아버지는 꼿꼿하게 앉아 있고 그 절반을 조금 더 넘은 딸은 누워 뒹굴뒹굴한다. 아버지가 일어나더니 다용도실에서 뭔가를 들고 온다. 무심히 옆에
툭. 비닐봉지에는 센베이 과자가 들었다. 아버지가 하나 꺼내 드신다. 나도 하나 베어 문다.
"아버지, 옛날에 동산 아래 밭 가운데 있던 집 기억나세요?"
"그럼 기억나지. 막이 하나 있었지."
아버지는 집이라 하지 않았다. 막이라고 했다.
막은 겨우 비바람을 막을 정도로 임시로 지은 집을 말한다. 동네 밖 밭 가운데 있는 안호 할아버지의 흙집은 다른 사람들한테 집이 아니었다. 집은 포근하고 아늑한 보금자리여야 하는데 남이 보기에 밭 가운데 흙집은 그렇지 못했다. 그렇다면 한 세기를 산 아버지에게 집은 무엇일까.
지금 사는 잔두리 집에서 100년을 산 것은 아니지만 아버지가 일가를 이루고 살기 시작했으니 80여 년쯤 되었다. 그동안 잔두리 집은 두어 차례 변화가 있었다. 짚을 엮어 이은 초가지붕은 파란 슬레이트 지붕이 되었다. 정지(부 엌) 아궁이에 걸린 큰 가마솥은 구수한 누룽지를 만들기도 하고, 달달한 조청을 고기도 했다. 부뚜막은 가마솥뿐 아니라 집 밖에 있던 샘에서 물을 길어 담아두던 두멍을 품었다.
그릇을 옹기종기 안았던 나무 찬장과 삐그덕 소리를 냈던 정지문. 아무리 바지런한 엄마여도 그을음으로 까맣게 된 정지 천장과 벽을 본래의 흙빛으로 유지하기란 쉽지 않았다.
타닥타닥 마른 솔잎이 불쏘시개가 되고, 짚불에 국시꼬랭이를 굽던 아궁이는 초가지붕과 함께 사라졌다. 부엌은 아궁이 대신 연탄아궁이가, 연탄아궁이는 다시 가스레인지가 되었다. 덕분에 엄마 손 안에서 둥글게 뭉쳐졌던 지구를 닮은 누룽지는 더 이상 맛볼 수 없었다.
갈라진 틈 사이로 겨울바람이 숭숭 드나들던 정지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대신에 따듯한 보일러가 깔린 부엌에는 식탁이 놓이고, 그 위에 전기밥솥이 아버지의 밥을 지었다.
아버지는 집이 무엇이냐고 묻는 나에게 "모르지"라 고 답하셨다. 100년을 사신 아버지가 집이 뭔지 모른다는 대답은 [끝의 아름다움]에서 100세 생일에 '끝'이 무언지 모르겠다며 끝의 의미를 찾아 나서는 거북 니나와 닮았다.
아버지에게 집은 그저 다른 의미를 부여할 필요 없는 그 자체로 집, 아버지였을까.
모르지 했던 아버지는 말이 없었다. 생과 사, 소멸과 태어남, 시작과 끝의 순환을 품고 있는 집. 잔두리 집은 나와 언니들이 태어나고 성장한 큰언니가 마당에서 결혼식을 했다.
기쁨의 이면에는 슬픔도 있다고 했든가, 미처 생을 펴보지도 못한 꽃다운 언니와 늙지도 않고 늘 그 자리에 머물 것 같던 엄마가 이 세상 소풍을 마치고 떠났던 곳이다.
언니들이 결혼할 때는 아지메들이 사랑방에 모여 이불을 만들고, 부엌 가마솥에서는 잔치국시가 끓기도 했다. 외양간에서는 황소가 되새김질하고, 헛간에서는 수탉이 아침을 알리기도 한 곳.
봄이면 앞산에서 들리는 뻐꾸기 소리를 담고, 여름 소낙비에 회장품 파는 왕굴따이(눈이 커서 붙은 별명) 아지메가 잠시 비를 피해 갔던 집. 매섭게 추운 겨울밤에는 낯선 나그네가 들었던 곳, 잔두리 집은 아버지였다.
집은 사람을 짓고, 잔두리 집은 그렇게 아버지를 지었다.
파란 지붕의 잔두리 집은 화려하지 않다. 수수하다 못해 그저 그런 집이다. 수수한 겉만큼이나 집 안도 별반 다르지 않다. 반짝반짝 빛나는 가구보다는 세월을 입은 손때 묻은 살림살이가 잔두리 집을 지켰다.
거실에는 세 개의 붓글씨 액자가 걸려있다. 만사형통, 인덕시보, 청청세심.
친구분이 써준 인덕시보라는 글씨 옆에는 '청원 시백'에게 라는 글귀가 써졌다. 청원은 아버지 친구분이 붙여준 아버지 호이다. 맑은 사람, 청원. 80여 년의 삶을 산 잔두리 집은 아버지를 맑은 사람으로 지켰던 모양이다. 100년을 산 아버지는 자신의 삶을 공경한다. 과한 욕심을 부리지 않고, 자기 삶에 정성을 다한다. 잔두리 집은 아버지를 닮았다.
아니 아버지가 잔두리 집을 닮았다고 해야 할까.
집을 짓는 이는 사람이다.
그 집이 사람을 짓는다.
집이지만 집이라 불리지 못한 안호 할아버지의 흙집은 할아버지에게는 춥지도 덥지도 않은 봄날의 따스함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흙집은 봄날 새싹을 밀어 올리는 훈훈함으 로 안호 할아버지를 짓지는 않았을까. 누군가에게 서향집은 덥고 추운 집일 수 있지만 지는 해를 좋아하는 이에게 더없이 아름다운 서향집이 될 수 있다.
잔두리 파란 지붕의 초록 대문집이 아닌 곳에서 나고 자랐다면 어땠을까.
소똥 냄새 진동하고 비 오는 날 마당에서 지렁이를 곧잘 만나던 그곳. 잔두리 집은 아버지이고 곧 나이다.
그 집에서 아버지가 주신
센베이 과자를 먹는다, 아버지와.
바삭바삭 달다.
잔두리 집은 그녀에게 영혼의 자궁과 같았을까.
그곳에서 떠나보낸 모든 영혼이 그녀와 숨쉬고 있던 곳일까.
사랑하는 이들로 인해 집의 생사를 떠올린 그녀가 더이상 아프지 않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