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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와 독자

- 순전히 내 생각

by 캐리소


내 생각의 깊이가 아주 얇아서 파사삭 깨지거나 우두득 뜯어지는 경우,


그럴 때 내 마음속에는 두 가지 생각이 떠오른다. 하나는 쾌감이고 하나는 열패감이다.

같은 감인데 왜 다를까?

경쟁하는 것도 아닌데 내면에 나는 항상 이기고 싶은 마음이 있나 보다.

그 마음이 먹이를 낚아채려다 놓친 후 자연스럽게 낚아챈 것이 바로 열패감이다.


어젠 이런 생각으로 내 열패감에 열기를 더했다.

어떤 작가의 글이 너무 어렵고 난해하게 느껴질 때, 속으로 '좀 알아먹기 쉽게 써주면 안 되나?' 할 때가 있다. 그럴 때의 나는 땡깡을 부리는 세 살 아이의 수준이 된다. 공공장소에서 떼를 쓰는 건 안된다는 엄마의 훈육보다는 지금 당장 내 요구가 관철되는 게 중요한 아이처럼 말이다.


그런 찰나의 나는 내가 읽고 있는 모든 글이 나의 정신을 통과할 때 통역관 수준으로 텍스트를 풀어내 주기를 바란다.

그런 마음이 드는 이면에는 세상의 모든 것을 편하게 알아내고야 말겠다는 오만방자가 코웃음을 자아낸다.



문화의 수준은 그 시대의 사람들이 결정하는 것처럼 작가의 수준도 독자가 결정한다.

이렇게 어리석은 독자를 둔 작가가 있다면 자신의 수준을 몇 단계나 낮춰 독자에게 맞춰야 하는가?


그러나 나의 결론은,

터무니없는 독자가 어떤 요구를 하더라도 작가는 하위 수준으로 내려가면 안 된다.

비록 당장은 이해받지 못하겠지만, 독자의 수준을 맞춘답시고 자신의 수준을 낮추는 것은 결국 함께 침몰하는 것일 뿐이다.

(사실 그런 작가가 있을까 싶긴 하지만)


그는 독자의 수준을 높여 자기의 위치로 끌어올려야 한다. 그리고 나면 작가는 자연스럽게 한 단계 상향하게 되고 결과적으로 수준 높은 독자를 양성하는 데 성공할 수 있다.

그게 바로 예술가의 자존심이다.


대한민국의 영화 수준을 높인 감독으로(바로 떠오르는 감독이 둘밖에 없다) 박찬욱 감독이나 봉준호 감독을 들 수 있다. 그들의 초기 작품은 흥행에 성공하지 못했지만, 그들은 자신이 가진 독특한 시각을 흥행과 타협하지 않고 오랜 세월 동안 자신의 생각대로 영화를 만들어 역량을 입증했다.(난 그들의 영화를 좋아하지는 않는다)

그래서 그들은 한국영화의 수준을 높일 수 있었다.


진정한 작가는

책이 팔리지 않아도, 영화를 보러 오는 관객이 적더라도 자신이 가진 예술성을 놓지 않아야 한다. 그래야 끝까지 살아남는 것이다.

이 부분에서 도파민처럼 터지는 쾌감이 있다.

암, 그래야지! 하는 것도 있고.


그러므로 작가는 독자를 위해 글의 수준을 낮추는 것이 아니라 더 깊은 독자층을 아우르기 위해서 자신의 예술성을 갈고닦아야 한다.

독자의 눈높이에 맞추어 자신을 하향시키는 것은 작가의 창작성을 죽이는 일이다.


또한 진정 성장하고 싶은 독자라면 수준 높은 작가의 글에 자신을 자주 노출시켜서 자신의 수준을 끌어올리는 데 집중할 필요가 있다.


그렇게 하는 것이 바로 내가 좋아하는 작가의 눈높이에 내 키를 맞추는 방법이다.


구약성경 에스겔 3장 17절에서 '너를 이스라엘 족속의 파수꾼으로 세웠으니 너는 내 입의 말을 듣고 나를 대신하여 그들을 깨우치라'는 구절이 있다.

여기서 너는 선지자 에스겔을 말하는 것이다.

에스겔에게 이스라엘 사람들을 향해 신의 말을 대언하여 전하라는 엄중한 명령이 내려지는 장면이다. 에스겔은 성도들에게 신의 말을 알아듣게 하기 위해 기꺼이 순종이라는 도구를 사용한다.


이처럼 독자는 자신을 키울 수 있는 작가의 방향성에 자신의 어리석음과 미련함을 내려놓고(내 얘기다) 그의 글에 순종해야 얻을 것이 생긴다.

그게 단순한 앎의 기쁨일 수도 있고, 한 단계 업그레이드되는 자신의 정신세계 일수도 있다.


그러므로 작가는 독자를 깨우치기 위해 자신의 신념을 더욱 강화하는 쪽으로 글을 써야 한다.


독자도 자신에게 감흥을 주는 글을 만났고 그것이 높은 수준이라고 여겨질 때, 그 수준 있는 글을 알아듣기 위해서 자신을 그 글에 계속 노출시키면서 그 글을 읽고 소화할 수 있을만한 수준으로 자신의 안목을 격상시켜야 한다.


그러므로 작가가 자신의 신념을 버리고 독자의 수준으로 내려오는 건 말이 안 된다. 물론 작가도 글을 쓸 땐 타깃독자를 염두에 두고 쓴다.

그러나 수많은 사람의 수준을 골고루 맞추는 것은 불가능하며, 불가능한 일에 에너지를 쏟는 건 비능률적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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