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 갔다가 오는 길에 우리 동네 초입에서 마주치는 할머니.
다른 이웃분 하고 손을 맞잡고 깔깔깔 반갑게 인사하신다.
나를 보시더니 "명절 잘 쇠셨어? 애기 많이 컸지?(애기는 늙어서 고3이 되었어요. 할머니) 그래. 고마워. 고마워."
뭐가 그리 고마운지 연신 진심을 다해 고맙다고 하신다.
그 인사를 듣는데 아무것도 아닌 인사 하나가 정말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닌 파급력으로 고마움을 견인한다. 나도 뭉클 고마워서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건강하세요." 하고
자동반사 인사가 나온다.
마르크스와 레닌이 일으켰던 혁명은 아주 작은 것도 바꾸지 못했지만* 이렇듯 동네 할머니와 찰나의 마음을 주고받는 일은 내 마음 깊은 곳까지 건드려 수많은 걸 바꿔버리게 한다.
관심이 던진 작은 파문은 마음의 샘을 열고
감사가 주는 비전은 행복의 물결을 일렁인다.
정의의 실천에는 일종의 적정성이 존재한다. 따라서 그것은 적정성이 받아야 하는 모든 시인을 받을 만하다. 그러나 그것은 현 실적으로 적극적인 선(positive good)을 창출하지는 못하므로 감사를 받을 자격은 거의 없다. 대부분의 경우에 있어서 단순한 정의는 단지 소극적인 미덕으로서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이웃들을 해치는 것을 막아줄 뿐이다. 이웃 사람의 신체. 재산 또는 명예를 침해하지 않는 데 불과한 사람에게 어떤 적극적인 공로가 있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는 특별히 정의라고 불리는 것의 모든 준칙들을 이행한 것이고. 그와 지위가 같은 사람들이 그에게 적정하게 그것의 이행을 강제하거나 또는 만일 이행하지 않을 경우 그를 처벌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을 다 실 천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흔히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조용히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정의의 모든 준칙들을 이행할 수도 있다.
- 도덕감정론, 애덤스미스.
'정의'라는 조금은 무거운 단어에 경직되는 면이 없지 않지만 소소한 선이라고 해서 정의와 거리가 멀다고는 할 수 없다.
오늘은 적극적인 선(positive good)에 대해 살짝 생각해 보는 시간이었다.
누군가의 말처럼 남을 위해 고귀한 희생을 하는 것이 적극적인 선의 최고봉인지도 모른다.
그건 때로 너무 거대하고 멀게만 느껴져서 종종 나 자신의 얄팍한 민낯을 발견하게 만드는 매개체가 되기도 한다.
하지만 적어도 평범한 소시민인 우리에게는 작은 위기 상황이나 소소한 선택 앞에 설 때에 할 수 있는 것을 한번 더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과거에 아이의 잘못에 대해 함께 가서 적극적으로 사과한 일이라든지, 지난주에 있었던 사건 속에서 가족들의 안전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최대의 분개를 표출한 일이라든지.
동네 할머니의 깻단을 날라드리는 아주 미미한 일에서 이미 나는 한번 더 하는 즐거움을 누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애덤스미스는,
'자혜와 관용은 자혜롭고 관대한 사람들의 몫이 되어야 한다고 우리는 생각한다'고 말한다.
자혜와 관용은 특정한 사람들, 영웅적인 사람들 에게서만 찾아볼 수 있는 미덕은 아니다.
풀이 자라는 곳에서,
농부가 지나다니는 흙길에서,
일을 마치고 툴툴 털며 나누는 밥 한 술에서도 엿볼 수 있는 것이다.
잘 보이지 않지만 선을 이루는 협력 안에서는 선명하게 보이는 positive good이다.
행복하다.
* 임모틀맨, 네빌 고다드.
** 지담 작가님이 제시한 내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