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말리피센트가 등장하는 이유
딸아이의 방황을 바라보는 우리의 마음은 아슬아슬했다.
작은 망아지가 자신이 다칠 줄도 모르고 좁은 우리에서 날뛰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처럼.
그때 우리 부부는 부모로서의 미숙함과 서투른 판단으로 인한 고통을 고스란히 감내하고 있었다.
하루하루 두려움과 싸우면서 우리가 내린 결론이 아이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가늠해 보는 일로 에너지가 소진되었다.
내 생의 가장 칠흑 같은 암흑기라고 생각하던 시기였다.
한 번은 남편과 대형마트로 장을 보러 간 적이 있었다. 장보기를 마치고 주차장으로 발걸음을 옮기고 있는데 소란스러운 비명소리가 우리의 귓전을 때렸다.
무슨 일인가 싶어 소리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려보니 아빠와 딸의 언쟁을 벌어지고 있었다.
"아빠가 뭔 상관인데 이제 와서 지랄이야!"
"뭐가 어쩌고 어째?"
아빠보다 딸의 언성이 점점 높아지고 고함의 정도가 심해진다 싶을 즈음 빡 소리와 함께 지켜보는 모두의 입에서 낮은 탄성이 흘러나왔다.
화를 참지 못한 아빠가 딸의 뺨을 올려붙인 것이다.
일순 잠시 정적이 흘렀다.
"네 맘대로 해. 이 XX X아!"
자신의 행동에 화들짝 놀란 아빠는 딸을 남겨두고 떠나버렸고 딸도 엉엉 울며 어디론가 가버렸다.
딸이 정말 자기 맘대로 할까 봐 가장 두려워하는 사람이 바로 아빠일 텐데, 우리는 자기 진심과는 다르게 반대로 말하는 일에 얼마나 익숙한 걸까?
그 장면을 본 우리는 착잡하고 놀라고 한편으로 그들의 처지가 너무 공감돼서 무거운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왔다. 수많은 경로가 기다리겠지만 그들이 진정으로 서로 화해했기를 바라는 마음이 되었다.
사실 좁은 우리(于里)는 정리된 정신의 우리(于里)를 짓지 못한 우리 자신이었다.
제대로 된 삶의 방법과 길을 보여주지 못한 미숙한 부모가 가장 벗어나야 할 좁은 우리였던 것이다.
딸은 그 우리를 온몸으로 부수고 자신의 이상을 향해 줄달음치느라 날뛰는 과정이 필요했던 거다.
30대가 훌쩍 지난 딸에게 그때의 일을 물어봤다.
그때 왜 그랬느냐고.
곰곰 생각하던 딸이 조금은 발그레한 얼굴로 말한다.
"나도 모르겠어. 왜 그랬는지......"
그저 부모와 자기의 마음이 다르다는 사실에 당황했고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봐주는 사람이 없어서 외로웠노라고. 그런 방법이 아니어도 얼마든지 자신을 표현할 수 있었을 텐데 그땐 자신도 어리고 미숙해서 몰랐다고 했다.
그래서 우린 함께 눈시울이 붉어졌고
서로를 이해했으며
아픔에 공감하지 못한 과거의 서로에게 사과했고
맺힌 마음을 풀었다.
혼돈의 가장 정수에 있는 우리 앞의 말리피센트*는 자신이 할 일에 대해 정확히 안다. 분탕질은 정화를 위해 필요한 일이라는 것을. 그 일은 일어나야 하기 때문에 우리에게 닥친 것이었다.
아이를 보호하는 데에만 급급했던 우리는 부정적인 현실에 대처할 힘과 지혜를 막고 있었**던 것이다.
정말 두려운 것은 아이가 배워야 할 것을 가로막는 우리의 근시안적인 태도다.
자연의 부정적인 힘에 맞설 용기와 능력을 기를 수 있도록 내 아이의 인생에 악의 여왕을 초대해야 하는 것**이었다.
우리가 악의 여왕을 잠깐이라도 초대하지 않았기 때문에 맞설 힘이 없는 아이는 무의식에 잠들어 있는 편을 택했을 것이다. 잠자는 숲 속의 공주처럼.
부모가 먼저 어려움에 용기 있게 대처하고 자신의 신념에 당당한 모습을 보여주면 되는 것이었다.
그러면 아이는 부모의 모습에 힌트를 얻어 자신만의 용기와 능력을 만들었을 것이다.
그때의 우리도 그런 말리피센트에 직면해서 허둥거렸다.
그래도 잘 헤쳐 나왔다. 아무도 다치지 않았고 각자의 길에서 낙오되지 않았다.
자신의 삶을 잘 꾸려가고 있는 것이 그 증거다.
과거의 이야기를 편안하게 주고받을 수 있다는 게 증거다.
그건 우리를 크게 키우려는 신의 개입, 신의 지혜였다.
그때는 몰랐다.
내가 더 커져야 할 이유.
난 나 하나만 커버하기도 버겁고 힘겹다고 생각했지만 더 큰 포용을 위해 난 우산이 되어야 했고 상처치료 밴드가 되어야 했고 나만큼 여린 사람들의 증거가 되어야 했다. 그러기 위해 그것들을 거쳐야 했고 겪어야 했고 넘어와야 하는 것이다.
그 어려운 시기에 아기인 막내를 업고 지고 딸의 일을 해결하러 다닐 때 지금도 잊을 수 없는 한겨울 비를 고스란히 맞고 다니던 한기로 각인되었다. 그 마음을 잊지 않는 이유는 그것이 거름이 되어 더 큰 대지로 나아갈 발판이 될 거라는 확신이 있기 때문이다.
이젠 딸이 자신의 아이들을 키우는 중이다. 딸의 우리를 박차 멋지게 벗어날 아이들을 위해 더 넓고 자유로운 우리를 보여줄 수 있다면 난 나의 경험과 지식을 아이들에게 벗어줄 마음이 있다.
빛나는 귀결을 향하고 있는 우리의 삶에서 지금도 귀결로 가는 길을 하루씩 걷고 있는 중이다.
그 길에 꽃이 피고 풀이 자라고 바람이 불고 폭풍우가 치는 것은 너무 당연하지 않은가?
그런 자연스러운 말리피센트에 너무 놀라지 않기를 바란다.
말리피센트를 만나면 힘과 지혜, 용기와 능력 다 꺼내서 사용하면 된다.
근데 준비해두지 않으면 낭패라는 건 잊지 말아야 한다.
* 말리피센트 : 동화 '잠자는 숲 속의 공주'에 나오는 마녀. 악의 여왕으로서 공주의 세례식에 초대되지 못한 일로 공주의 열여섯 살에 물레 바늘에 찔려 죽을 것이라는 저주를 건다.
** 질서너머, 조던 피터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