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한 이름이지만 부르기 전에 망설이게 되는 이름, 정은이.
정은이는 장미 맨션에 입주하고 한참 지나 고등학교에서 만난 친구이다.
장미 맨션과는 거리가 좀 있던, 시장 입구 쌀집 딸이었다.
정은이는 첫눈에 보기엔 매우 허술하고 빈틈이 많아 보였는데, 의외로 공부를 꽤 잘했다.
무엇보다 주변에 항상 사람이 많았다. 호불호 없이 모두가 '호'를 외치던 만년 반장감이었다.
어른이 되보니 알것 같다. 정은이가 성적도 좋고, 인기가 많았던 이유는 모든 일에 마음을 다해 즐겼기 때문이었다.
정은이와 함께 주번이 된 적이 있다. 주번의 일과 중에 하나는 몸집보다 더 큰 파란색 쓰레기통을 들고 소각장에 가는 것이었다. 매점 가는 아이들과 반대 방향으로 걸어가면서도, 뭐가 그렇게 웃겼는지 실성한 듯 웃었던 기억이 난다. 쓰레기 버리는 일이 그렇게 재밌는 일인 것을 정은이랑 같이 주번이 되고 나서 알았다.
풍선껌 중에 덴버 판박이로 낱개 포장된 껌이 있었다.
그 판박이가 뭐라고, 한동안 턱이 나갈 때까지 씹어 모은 적이 있었다.
당시에는 목적 없이 모았던 판박이 스티커였는데, 담임 선생님이 새 차를 뽑았다는 소식을 듣고 목적이 생각났더랬다.
*여기서 담임선생님에 대해 잠깐 설명하자면. 그때 우리 눈에는 차인표였으며, 많은 아이들이 동경하고 좋아했던 선생님이었다. 가장 친하게 지낸 친구 중에 하나가 담임선생님을 너무 좋아해서 선생님과 개인 상담을 하기 전에 그 아이 허락을 받았어야 했다*
차인표에게 관심을 받고 싶었던 정은이와 또 다른 친구 2명까지 더해서, 우리 4명은 선생님 새 차의 4면 유리창을 덴버로 채웠다.
다시 생각해도 등에 땀날 정도로 오싹한 또라이 짓이었다.
하지만 우리의 차인표 님은 소중한 본인의 차가 덴버로 채워진 것을 보고도 검지 손가락만 까딱까딱할 뿐 별다른 체벌을 하지 않았다. 공범이 우리 반 반장 정은이여서 그랬던 걸까.
우리는 덴버의 풀기가 마르기 전에 말끔하게 제거해 드리고 용서를 빌었으며, 선생님은 그 후로 그 차를 보이는 곳에 주차하지 않으셨다.
그렇게 정은이와 함께 고등학교를 후회 없을 만큼 즐겁게 보냈고, 각자 대학교에 들어가 정신없이 신입생 1년을 보냈다. 정은이는 대학에 가서도 온갖 감투를 쓰고 있었고 항상 바쁘게 지냈다.
2학년이 되던 2월 , 지겹게도 길던 겨울이었다.
정은이는 강원도에서 하는 신입생 환영회를 준비한다고 선발대로 간다고 했고, 우리는 또 정은이가 정은이 하네. 하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그 지겹게 길던 겨울 2000년 2월 17일, 잘 보지도 않던 뉴스에서 xx대학교 동아리 연합회 버스 전복사고 소식을 들었고, 자막 속에 신원미상 사망자 글자에 뇌가 정지된 것 같았다.
나와 덴버 스티커 공범 친구 2명은 신원 미상이 정은이가 아닌 것을 확인하기 위해 동서울 터미널에서 만나 미시령으로 향하는 버스를 탔다. '설마'와 '혹시'로 혼란한 생각 때문에 어지럽고 메스꺼운 데다가 안 하던 버스 멀미로 뇌와 내장을 다 밖으로 꺼내서 씻고 싶었던 시간이었다.
술을 즐기지 않아서 필름이 끊긴다는 느낌은 잘 모르지만, 그 버스 안에 있던 시간부터 정은이 장례식까지의 시간이 어떻게 흘러간 건지 정확하게 기억이 나지 않는다. 이런 느낌인가 보다.
장례식장에서 본 것은 장소를 메운 사람과.. 또 사람들이었다.
20년 동안 정치를 했어도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왔을까.
가족, 친척, 국민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 그리고 차인표 선생님까지.. 전국의 정은이를 아는 모두가 온것 같았다.
그 날 그 무드와는 어울리지 않던 감정인데.. 외롭지 않게 보낼 수 있어서, 그리고 정은이가 가장 즐거운 순간에 간 것 같아서 - 안심되었다.
아마 그 버스 안에서 정은이는 벨트도 안 매고 서서 사회를 봤거나, 돌아다니며 사람들을 챙겼을것이다.
그렇게 매 순간을 온 맘을 다해서 즐겁게 살다 갔을 정은이에게,
2월 17일이 다가오니 네가 너무 보고 싶다고.
웃으면 얼굴 절반이 웃는 입으로 채워지던 네가 너무 보고 싶다고 말하고 싶다.
*이 글은 2월에 써놓고 발행을 망설였었다,
다행히 아프지않게 글을 마무리 하였고 용기내서 발행 버튼을 눌러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