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메이린 Mar 18. 2024

아빠의 첫차 엑셀

동그랗지도 각지지도 않은 네모

작지도 크지도 않았던

다섯 식구가 타면 틈 없이 꼭 맞았던

아빠의 첫차는 은회색 엑셀이었다

 

아빠는 시승식을 하겠다고 온 가족 끌고 나가 한 바퀴 돌자고 하셨다.

그날의 첫 승차감은 마치 십 년을 탄 차처럼 익숙하고 부드러웠다, 아빠 운전스타일도 그렇지만 융단시트 때문에 더 부드럽고 스무-스 했던 그날의 시승.


멀지도 않은 거리를 가면서 간식은 왜 그렇게 많이 챙겼을까? 그날 먹은 과자부스러기와 엄마가 싸 온 과일 국물로 인해 보송보송했던 융단은 금방 끈적거리고 버석거리게 되었다.

의자 틈 사이로 손을 넣으면 몇 달 전 먹은 과자와 젤리가 원형 그대로 보존되어 있던 융단시트의 놀라운 보관능력은 옵션.


우리 삼 남매에 다정하지도 살갑지도 않았던 아빠였다.

하지만 아빠의 엑셀을 떠올리면, 내가 본 남자 중 가장 너그럽고 인내심이 많은 사람으로 기억된다.

그렇게 소중한 차를 더럽혀도 일생을 한마디 잔소리 안 하셨기 때문이다.

반면 우리 아이들은 차에서 과자를 먹는다는 건 상상할 수 없는 일인데 말이다.


내 인생 베스트 드라이버는 우리 아빠였다. 그 어떤 택시나 버스를 타도 아빠 차만큼 숙면을 취할 수 있는 편한 차는 없었다. 심지어 눈 오는 대관령 고갯길에서 낭떠러지로 떨어질 뻔한 위기에서도 우리 삼 남매는 자느라 몰랐단다. 엄마와 아빠가 두고두고 얘기하는 모험담인데, 너무 들어서 안 봤어도 본 것 같다.

면허를 따고 운전한 지 수년이 지났지만 나에겐 늘 운전이 챌린지다. 특히 초행길을 갈 때는 핸들과 온몸이 밀착되어 조수석에 앉은 사람이 더 불안해서 어쩔 줄을 몰라한다. 그렇게 덜덜거리며 운전할 때면 항상 아빠의 대관령 서킷을 떠올리며 용기를 내어본다.




일흔 중반이 된 내 인생 베스트 드라이버가 늑막염으로 얼마 전 병원에 입원하셨다.

늑막에 물이 가득 찬 상태로 셀프 운전해서 병원 응급실에 가셨다고 한다. 아빠의 운전 실력을 진심으로 신뢰하지만 그 얘기를 듣고 마음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헐렁한 환자복에 감춰진 쪼그라든 몸을 보고 오는 길,

문득 엑셀 뒷좌석에서 보던 아빠의 오른쪽 어깨가 생각나 먹먹하다.



이전 06화 비엔나소시지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