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엄마의 고향은 공기 좋고 물 맑다는 옥천이고 엄마의 요리솜씨도 공기 좋고 물이 맑다.
굉장히 클래식하다는 뜻이며, 절대로 비하하는 게 아님을 분명히 해둔다.
엄마는 그런 당신의 요리에 굉장한 자부심을 가지고 계신다.
하지만 엄마가 자신 있어하시는 음식은 어렸던 내가 도전하기에는 레벨이 다소 높은. 동치미, 부침개, 파김치, 해물탕 등등이었다. 성인이 된 지금은 없어 못 먹는 귀한 음식 되겠다.
의무 급식이 시작되기 전이라 매일 도시락을 싸가지고 다녔던 때였다.
그때 난 도시락 뚜껑을 여는 게 여간 부끄러울 수가 없었다.
뚜껑이 열리는 순간, 파김치에 베인 까나리 액젓의 진한 향이 온 교실을 지배했었기 때문이다.
짝꿍이 싸 오던 분홍 소시지가 부러웠고, 정갈하게 담긴 비엔나소시지가 부러웠다.
"엄마 나도 소시지가 먹고 싶어."라고 집에 가서 투정할 때면,
엄마는 인스턴트를 극혐 하는 건강 전도사님이 되셨다.
"소시지 같은 그런 거 맛도 없고 몸에도 안 좋아"
그러나 뉴-슈가와 미원과 다시다가 떨어지면 불안해하시던 모순덩어리 건강전도사님.
점심시간은 내게 하루 중 가장 긴장되는 시간이 되어가고 있었다.
파김치 향을 견뎌낼 용기와. 다른 아이들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을 패기가 아직 없었기도 했고
짓궂은 남자아이들은 젓가락을 들고 "한입만" 하며 돌아다녔기에 나는 그 아이들 무리가 내 옆으로 올까 봐 늘 조마조마했다. 고작 도시락 때문에, 소시지 없는 촌스러운 도시락이 부끄러워서 그때 난 교실 안에서 가장 작은 모습으로 쪼그라들어 있었다
네 건 안 먹어
이 한마디로 수치심은 극대화되었지만, 그 더러운 기분과 함께 묘한 해방감도 들었다.
오늘 나의 토끼 같은 아이들이 반찬투정을 심하게 했다.
그 때문인지, 어렸던 나를 문득 돌아보며 "그래, 그럴 수 있지"로 마음을 다스려 본다.
지금의 내 나이였던 그때의 엄마에게, 속 없이 반찬 투정을 했던 나를 용서하시고 앞으로도 은혜로운 반찬들의 공급을 중단하지 말아 달라 간절히 부탁하는 바이다.
역시, 클래식의 가치는 시간이 지날수록 빛을 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