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현재 다니는 회사는 홍콩계 기업이고,비즈니스 형태는 나라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세계 여러 나라에 지사를 두고 있다. 난 여기 이 애증의 한국 지사에 2006년 입사해서 7년 반 근무하면서 격무에 반비례하는슬픈 연봉에 현타 느끼고 다른 회사에 이직했다가, 그 회사 망하고 다시 여기재입사하여 6년째 근무 중이다.
그리고 곧 해고될예정이다.
회사 규모가 줄고 줄고 줄어서 첫 입사 당시 300명이던 직원이 지금은 50명 남았다.
그 간에 자의로, 타의로 방출된 인원이 적어도 250명, 그 간에 들어오고 나간 사람은 또 얼마나 많던가.
이 회사를 탈출? 해서 같은 업계로 이직한 친구들도 많이 있고, 전혀 다른 업계로 이직한 사람들도 꽤 있는데 그중에 본인이 좀 잘 풀렸다 싶은 사람들은 마치 금의환향을 한 것처럼 한 번씩 회사에 점심을 먹으러 온다.
그중에 반응이 좋은 직군은 '공무원'이다.
나보다 먼저 회사를 나간 선배가 있다.
그 선배는 회사를 나가자마자 두문불출하며 공무원 시험준비를 했고 한 번에 합격했더랬다.
불투명한 미래를 앞둔 나와 내 동료들에게는 이보다 더 멋진 롤 모델은 없었다.
물론, 신입초봉으로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부담은 있는 것 같다.
하지만 작금의 상황, '정년 보장'이라는 그 단어보다 매력적인 조건이 또 있을까?
그 선배와 통화를 할 때면 늘 나를 도발한다.
그런 거지 같은 회사에서 버. 튀어.
야, 너도 할 수 있어.
나는 그 도발에 또 넘어가고 만다.
귀가 얇고 순종적인 나의 천성과 기질을 원망하며.
공시생 카페와 중고나라, 당근을 뒤지고 뒤져서, '간'만 보고 책을 덮어버린 애틋한 사연을 가진 사람들의 책을 사 모았다. 그런 애틋한 사람들의 책은 모두 새 책 수준이다. 내가 안다.
새 책을 사면 될 것을 왜 굳이 중고를 뒤적거렸나 되짚어 보니, '중도 포기'를 대비한 나의 치밀함에 또 소름 끼친다.
일반 행정직은 응시생도 많지만 뽑는 사람도 많고 다른 직렬보다 진입장벽이 낮아 보였다.
웬걸. 나에게는 진입장벽을 마주하기도 전에, 옹성이 하나 더 있었다.
아직은 직장인 인 데다가, 주부 이자, 자식 둘을 건사해야 하는 엄마였던 것이다. 그것도 손 많이 가는 초등학교 저학년. 그리고저학년보다 손이 더 많이 가는 남편도 있다.
( 지금 나는 나의 포기에 대한 합리화를 적극적으로 하는 중이다 )
그래도 선배의 도발과, 이미 질러 놓은 책들이 있으니 뭐라도 해보자 싶어서 애들 재워놓고 책도 읽고 무료 인강도 들어보았다. 이런 주입식 반복 학습은 얼마만이던가.
처음 며칠은, 안 하던 것을 하는 설렘과 모르던 지식이 쌓이는 지적 허영심을 채워주었다.
그 약발은 얼마 안 가서 설거지에 밀리고, 밀린 빨래에 또 치이고, 그리고 첫째 아이의 피아노 콩쿠르와 줄줄이 있던 가족행사에 밀려 지금은 그 책들이 어디 꽂혀 있는지도 모를 지경에 이르렀다.
정말 할 말은 많은데 목이 메어서 여기까지만 한다.
어쨋는 나는, 또 한 가지의 시도를 했고. 포기는 했지만 아쉽지는 않다. ( 그런데 왜 책을 못 버리니 )
그나저나 그 선배 연락이뜸해서 다행이다.
님아 그 도발을 멈춰다오...
그리고 존경의 마음을 담아, 진심으로, 이 세상 모든 공시생들 특히 맘시생들을 응원하고 싶다.
*사진은 노량진 학원가를 검색해서 나온 인터넷 기사 사진인데. 내가 공시 준비하는걸 격렬하게 반대 하고 있다.. 진입금지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