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눈알이 저렇게 크고 투명한 갈색일 수 있는 건가?
방금 스크류바를 먹고 온 것 같은 빨간 입술은 뭐지?
내가 연희를 처음 본 날 들었던 생각이다.
머리카락은 어쩜 그렇게 길고 삼단 같이 숱도 많은지, 라푼젤을 꿈꾸던 내가 비루하게 느껴질 만큼 비현실적인 외모였다 (그 당시 내 눈에는 그랬다..)
연희 집은 우리 집 옆동 2층이었고, 2학년 같은 반이 되면서 항상 붙어 다녔다. 등하교는 물론이고 쉬는 시간 화장실도 같이 갔다. 이 시기엔 화장실 같이 가면 더 설명할 필요 없는 진짜 우정이다. 하교 후엔 서로의 집을 오가며 놀았는데, 주로 내가 연희네 집에 가서 놀았다.
연희네는 엄마와 오빠만 있어서 상대적으로 고요하고 평온하게 누구의 방해도 없이 놀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무엇보다, 연희방에 있는 만화책들을 잊을 수가 없다.
이미라의 인어공주를 위하여, 일본 만화 유리가면, 그리고 한승원의 프린세스 가 너무나 정갈하게 꽂혀있는 것이다. 심지어, 각각 비닐로 표지가 래핑 되어 있었다.
연희 방에 들어가는 건 내 의지였지만, 나오는 시간은 기약할 수 없는 마성의 공간이었다.
**인어공주를 위하여 / 유리가면/ 프린세스
연희는 외모도 그렇지만 순정 만화로 세상을 배우는 아이였다. 그 아이의 행동과 말투가 모두 만화 같았다.
가끔은 너무 오버스럽고 부자연스러워, 리액션이 심각하게 고민이 되기도 했다.
"있지, 나.. 그를 좋아하는 것 같아. 그와 사랑에 빠진 걸까 "
다시 말하지만. 그 당시 우린 초등학생이었다.
이런 조숙한 단어 조합에, 내가 어떻게 반응해 줘야 참 우정을 유지할 수 있을지 내 고민은 깊어져만 갔다.
그러는 와중에, 영원할 것 같던 우정에 금이 가게 된 결정적인 사건이 생겼다.
이름도 순정만화 주인공과 똑같은 반장 지원이를 동시에 마음에 품은 것이다.
(인어공주를 위하여의 주인공 푸르매 이름이 서지원이었다. )
연희는 거의 상사병을 앓는 수준이었다. 숨 쉴 때 빼고는 그 아이 얘기만 했으니까..
내가 지원이를 좋아한 것도 일종의 반복 학습과 세뇌의 결과다. 매일 지원이 찬양을 들으니 종교처럼 빠지게 된 것이 아닐까.
어쨌든 우리는 서로를 말없이 견제하기 시작했다.
외모만 따지면 처음부터 나에게는 승산이 없는 게임이었다.
하지만 반장이었던 지원이와 부반장이던 나 사이에는 일종의 동지애랄까? 관리자로서의 끈끈한 릴레이션십이 있었고 난 그걸 충분히 활용했다. 칠판 지우기, 떠드는 사람 이름 적기 등등을 함께 하며, 동시에 연희 눈치도 좀 봤다.
스산했던 어느 날, 내 책상 서랍에는 붉은색 네임펜으로 적힌 투서 같은 편지가 들어 있었다.
이런 편지를 평생 두 번 받아봤다. 연희에게 한번, 그리고 고등학교 논술 첨삭 지도 때 한번.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지만, 그 빨간 편지에는 만화책 대사에서 따온 저주문구들로 잔뜩 채워져 있었다.
그 사건 이후로 연희네 집에 발길을 잠깐 끊었었지만, 졸업 전까지 아주 잘 지냈던 기억으로 봐서는 내가 깔끔하게 지원이를 포기했던 것 같다. 사실, 그 빨간 편지가 지원이를 포기한 결정적 계기는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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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원: 너 본관이 어디야?
나 : 나? 달성 서
지원: 진짜? 나도 달성 서!
나 : 아.. ( 우린 안 되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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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없어졌다고 하는 동성동본 금혼제도를 거스를 수 없었던 국민학생의 슬픈 짝사랑이었던 것이다.
말하자면 난, 제도에 순응하고 우정을 지켰다.
우리가 사랑했던 푸르매